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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 2026-08-25 06: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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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가나안근로복지관 백승완 관장

남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저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가나안근로복지관 백승완 관장

가나안근로복지관 백승완 관장

잠시라고 생각했지만 평생이 된 장애인복지

남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저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세상의 편견을 없애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장애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는 지인이 한번은 물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장애인 친구를 점심에 만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정말 이상한 고민입니다. 밥 먹을 때 같이 밥 먹고 영화를 볼 때 같이 영화보고 차를 마실 때 같이 차를 마시면 됩니다. 친구들과 만나면 하는 일들 아닙니까?”

한국 최초 근로복지관 재제조토너카트리지 사업

가나안근로복지관은 사회복지법인 가나안복지재단 설립허가를 취득하면서 1995년도에 창설되어 2006년부터 보건복지부에 신규 사업을 승인받고 재제조카트리지 사업을 시작했다. 재제조카트리지란 기존의 사용된 카트리지를 수거하여 분해해 남아있는 폐 토너를 제거하고 손상되거나 재사용에 적합하지 않은 부품들을 교체한 다음 새 토너를 채워 재사용이 가능하도록 만든 카트리지를 말한다. 완전한 새 제품을 만드는 것 보다 비용이 절감되는 것은 물론 환경파괴 감소효과가 탁월하다. 또한 부품의 대부분을 수입하는 것을 고려하면 외화절약 측면에서도 돋보인다. 2003년 한국에서 장애인근로시설로써는 최초로 재제조토너카트리지 생산·판매를 개시하면서 현재까지도 꾸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데 이번 3, 4월에만 약 7억원의 매출계약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품을 만들어내는 근로자들은 45명의 지적장애인들이다. 전문기술자를 포함한 비장애인들이 지적장애인들에게 공정과정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면서 친환경 제품을 만들어낸다. 백승완 관장은 이곳 가나안근로복지관에서 직원들과 함께 재제조토너카트리지 사업을 이끌고 있다. 장애인근로자들이 생산해낸 제품은 질이 떨어질 것이라는 일반 대중들의 잘못된 인식을 품질은 정품의 98% 가격은 1/3로써 좋은 상품으로 손색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며 입지를 굳히는 중이다.

내 권익을 찾으려 정립회관 방문, 직접 뛰는 장애인복지 활동으로

지난 4월에 백승완 관장은 ‘서울시 복지상’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수상소감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물론 기쁘고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복지사업에서 몸소 뛰어 실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행동 보다 그저 기획과 행정 업무를 많이 해온 사람이라 남의 상을 가로챈 것은 아닐까 하는 기분입니다. 다른 분께 상이 돌아가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하니 부끄럽고 어색하군요.”라며 난색을 표했다.

공치사에 익숙하지 않은 백승완 관장은 가나안근로복지관 관장을 역임하게 된 지는 짧은 기간이지만 이번 복지상 수상 배경은 대부분 정립회관에서의 활동에 대한 수상이다. 정립회관은 1976년 한국에 설립된 최초의 장애인이용시설이다. 그 당시에는 장애인복지라는 용어가 없을 정도로 장애인들의 삶에 있어서 암흑기였다라고 표현했다. 백승완 관장은 이곳에서 36년간 머무르며 한국 장애인복지사업의 역사와 함께하며 일했다. 특히, 장애인 권익 향상에 앞장서며 관장까지 역임했다.

사실 백승완 관장 역시 소아마비로 지체장애 2급을 가진 장애인이다. 1972년도 즈음 백승완 관장은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70년대의 대학들은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고 이러한 대학들의 태도는 백승완 관장에게는 철벽과 같았다. 결국 2년을 거듭 낙방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진로에 대해 고심했다. 그리고 장애인이 할 수 있는 미래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라고 판단, 바로 공부를 시작하며 관련 회사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섰다. 당시의 컴퓨터는 대형컴퓨터로 공간을 많이 차지할뿐더러 활용도 역시 높지 않았고 몇몇 대기업 에서만 사용하고 있었던 때였다. 노력 끝에 입사시험에 도전했지만 역시 장애인이란 이유로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백승완 관장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정립회관의 개관 소식이 들려왔고 자신의 잃어버린 권익을 찾기 위해 정립회관을 찾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백승완 관장은 자신의 권익을 찾을 수 없었다. 후배 장애인들의 인권이 무시되고 자신의 전철을 밟거나 그보다 더한 일들을 겪고 있는 장애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일하기보다 후배장애인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기 바빠졌다. 방문을 목적으로 갔던 정립회관에서 일을 시작하고 정식으로 입사 제의를 받는다. 그렇게 운명적으로 장애인복지사업 전선에 뛰어들 수 있었던 그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단 격으로 다양한 구상들을 적극 펼치기 시작했다.

민간인으로서 일조한 장애인 운전면허제도

백승완 관장은 처음으로 했던 일을 회상했다. “어느 해 겨울에 스키장에서 사람들이 신나게 스키를 타는 모습을 보고 문득 ‘왜 장애인들은 스키를 탈 수 없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길로 서울대 체육학과 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방법을 모색했죠.” 다방면으로 고려하던 중 착안해 낸 것이 자동차 튜브였다. 튜브에 자원봉사학생과 장애인이 2인1조로 스키를 탔고 수단이 다를 뿐 스키와 같다고 생각했다.

백승완 관장의 이런 신선한 시도는 곧바로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고 뭐든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장애인복지를 ‘하면 된다’라는 인식으로 바꾸게 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를 시발점으로 장애인 해변캠프, 장애인을 위한 무료 세무·법률 상담기획 등도 처음으로 시도되었고 다각도로 장애인들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한편 장애 공무원 취업준비반을 만들어 맞춤 교육보급에도 힘썼다. 하지만 이 많은 일들 중에서도 백승완 관장이 특별하게 떠올리는 일은 장애인을 위한 자동차운전면허제도다. 생활에 필수적인 이동이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해 장애인들도 운전을 할 수 있는 제도와 특수 제작된 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80년도에 한국에서만 계획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낀 그는 미국에 가서 필요한 자료를 수집해와 연구하기 시작했다. 차에 필요한 특수장치를 고민하고 경찰청(당시 치안본부) 관계자들과 만나며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1983년 드디어 장애인 운전면허제도가 정식 만들어졌다.

“제가 직접 한 일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뤄낸 일이지만 민간인으로서 핵심 업무에 참여한 것 자체가 매우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장애인들의 가장 큰 불편은 이동성입니다. 기초적인 생활을 하려고 해도 움직임이 불편하죠. 하지만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어 이동은 가능해졌지만 차에서 내린 후 건물내부까지 들어가는 접근성 역시 문제가 됩니다. 여기까지는 제가 힘을 쓰지 못했지만 장애인 운전면허제도가 생긴 이후에 연계되어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장애인을 위한 여러 복지제도들이 있지만 장애인운전면허제도는 획기적인 것이었고 다른 복지제도보다 기여도가 컸다고 생각되어 이 일은 쑥스럽지만 유일한 저의 자랑입니다.”

백승완 관장은 <장애인의 자가운전과 삶의 질>이라는 논문 등 학문적 접근에도 에너지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은 장애인을 위한 편이시설 증진법까지 따로 제정되었을 정도로 장애인복지사업 안팎으로 발전이 많이 되었지만 백승완 관장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더디게 돌아왔을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없어야...

백승완 관장은 본질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즉,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장애인복지의 본질은 장애인이 차이는 있지만 차별을 받는 일은 생기지 않도록 하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것, 그래서 자신이 복지관에 존재하는 이유가 장애인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기 위해 되새긴다. 백승완 관장은 “장애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등입니다. 개개인의 능력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 때문에 차별을 받고 불평등하게 기회가 나누어지면 안 됩니다. 물론 모든 기회를 동등하게 제공받을 수 없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는데도 박탈되는 기회들을 아직 한국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백승완 관장은 가나안근로복지관의 장애인근로자들은 전문훈련을 받고 사업장에서 제품을 생산해내는 노동을 하며 정당하게 대가를 받는다고 했다. 최저임금이지만 비장애인들과 똑같이 노동을 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온전히 받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전국에 있는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의 근로사업장 중 가나안근로복지관과 같이 8시간 근무기준으로 최저임금을 지급하는 곳은 많지 않다. 야간작업에 수당을 따로 쳐주는 곳은 더구나 찾기 힘들다. 차별을 없애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는 비장애인들이 만드는 것과 견주어도 전혀 차이가 없는 고품질의 재제조카트리지가 말해준다.

천천히 가지만 결코 뒷걸음치지 않는다

복지는 함께 보다 높은 삶의 질을 누리며 사는 것에 목표를 두기 때문에 복지관에도 기본적인운영을 할 수 있도록 정부보조금이 나온다. 혹자는 근로활동 없이 장애인들에게 이 지원금을 똑같이 나눠준다면 장애인들은 더 큰 이익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백승완 관장은 이런 생각은 오히려 독이 된다고 잘라 말한다. 가나안근로복지관은 지체장애인들을 위해 지어졌던 정립회관과는 다르게 지적장애인들이 근로자로 일한다. 지적장애인들은 특성상 생활의 거의 모든 판단을 부모가 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지적장애인들이 당당하게 한 사회구성원 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장애인 부모의 소원은 같다. 단 하루만 더. 자식보다 자신이 하루만 더 사는 바람은 그만큼 자식이 혼자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 대한 걱정이 크다는 것이다. 백승완 관장이 부모들의 애틋한 마음에 공감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를 엿 볼 수 있다.

백승완 관장은 앞으로의 미래 사업에 대해서도 고심이 깊다. 각종 뷰어들이 만들어지면서 종이사용이 감소하고 있는데 종이감소는 곧 토너사용이 감소한다는 의미 이이므로 토너카트리지 재제조 시장이 매우 축소 될 것으로 전망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사업으로 가기엔 복잡한 기술력과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백승완 관장은 아날로그로 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비장애인들이 놓치고 가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궁리했다. 그는 근로장애인들이 사각시멘트벽의 공간을 벗어나 자연에서 함께한다면 건강은 물론 정서적으로도 크게 변화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장애인들에게 영농사업의 근로자로 일할 기회를 공동체를 통해 만들기 위해 다시 연구하고 있다. 항상 생각하고 미래의 발판을 만드는 사람, 안경을 쓰는 사람과 휠체어를 타는 사람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백승완 관장이다.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지 몸으로 뛰지 않아 한일이 없다고 말하는 그의 굳은살 박힌 손에 일손을 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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