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우리나라 법조계에서 헌신하며 사법체계를 발전시키고, 후학을 키우고, 사회정의에 온 몸을 던진 사람이 있다. 바로 법무법인 ’대종‘의 김영철 대표변호사. 1980년도 부산지검 평검사로 시작해 무려 23년간 검사로 활동해왔고, 이후 국민대 법대와 건국대 법대 교수를 거쳐 이제는 변호사로서 활약하고 있다. 또한 그는 지난 2019년 4월 42년 역사를 가진 사회지도층의 모임인 ‘한남클럽‘’의 24대 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법대 교수 시절 전국 법과대학장 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국내 로스쿨 도입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검사’, 혹은 ‘교수’라는 권위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검사 시절에는 피의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 친절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매일 출근 전에 웃는 연습을 연습하기도 했다고 한다. 40년간 남다른 철학과 신념으로 대한민국 법조계에 헌신해온 김영철 대표변호사를 만나보았다.
판사보다 검사 선택한 열혈 청년
김영철 변호사는 1980년 부산지검 평검사에서 대구지검 강력부장, 법무부 보호과장,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춘천지검과 수원지검 1차장, 서울고검 송무부장 등 검찰의 요직을 거쳤다. 이렇게 검사 생활을 하면서도 모교인 건국대에서 법학석사와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는 국민대 법대 부교수를 시작으로 모교인 건국대 법대 교수,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이 모든 이력의 출발은 바로 28세의 청년 김영철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뒤 판사를 할지, 검사를 할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볼 때 판사는 남들이 차려놓은 밥상을 보면서 맛을 평하는 위치 같았습니다. 그러나 검사는 사건을 맡아 발로 뛰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활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았죠. 28살이라면 누구보다 혈기왕성할 때가 아닙니까. 평생 책상 앞에 앉아 남이 만들어 준 일거리를 가지고 판단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검사를 해야 제대로 ‘살맛’이 날 것 같았고, 그것이 검사를 지원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검사로 지내면서 많은 유명사건을 맡기도 했다. 수사팀에서 전경환 5공 비리 사건을 맡아 배임과 횡령을 집중수사해 기소하기도 했고, 여의사 살인사건, 가수 김성재 살인사건을 맡기도 했다. 그렇게 23년 동안 검사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나이 50세 이르렀다. 그는 검사를 더 하기에는 ‘겉늙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수사하기에는 이제 나이도 들고 좀 겉늙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새로운 분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고, 때마침 국민대학교 법대에 교수 채용공고가 나서 지원했습니다. 1명의 교수를 뽑는데 총 6명이 지원했고, 다행히도 제가 선택을 받아 곧바로 학교에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수가 된 다음에는 검사와는 다소 다른 생활을 했다. 사실 초임검사라고 해도 수사 보조 인력이 지원되니 자잘한 일들은 모두 그들의 몫이었다. 김영철 변호사는 너무 어린 나이에서부터 그렇게 하니 이제 좀 탈피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 대걸레를 들고 교수실을 청소하기도 했고, 손님들이 찾아오면 손수 커피를 탔다. 일부 대학교수는 이메일마저 조교에게 관리하게 했지만, 김 변호사는 자신이 솔선수범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 하지만 나이 50대에 23년의 검사 생활을 했던 사람이 그렇게 빨리 변하기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김 변호사는 애초에 검사를 한 것도 권력이나 권위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저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대걸레질이나 커피 타는 일도 하등 불편할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그의 교수 생활에 매우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시기가 오고 말았다. 2006년 전국 법과대학장 협의회 회장을 역임할 때, 로스쿨의 도입 여부가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사법시험의 폐쇄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많은 법조인이 로스쿨 도입을 반대했지만, 김영철 변호사의 생각은 달랐다.
“ 이 시기만 해도 전국에 변호사가 400명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변호사가 적어서는 우리의 이웃들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에 가도 사무장만 면담하고, 변호사 얼굴 볼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만약 변호사가 많아지고, 그들이 각자의 전문성을 살려 기업에서 일하고, 공무원으로 활동한다면 법률가의 전문성을 살려 경쟁력이 향상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변호사가 희귀하니 브로커들이 날뛰면서 국민을 속이는 부작용도 막아야 했습니다. 거기다가 이제 우리나라의 법조인들도 세계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업들은 해외에 나가서 고군분투하면서 산업경쟁력을 키우는데, 법조인만 국내의 테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봤습니다. 실제 기업인들은 외국에서 법적인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외국 변호사들을 썼습니다. 만약 우리나라도 전문성을 가진 변호사들이 많이 생기면 이런 문제점들이 근본적으로 극복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드디어 입법돼야 하는 마지막 날. 만약 이날 로스쿨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폐기되고야 만다. 국회에서는 법사위를 통과해야 국회에 상정되지만, 법사위는 법안을 통과하지 않아 법안 폐기가 유력해지던 시간. 국회의장의 직권으로 상정한 뒤 결국 법안은 국회를 통과할 수 있다. 그때가 바로 밤 11시 50분경. 단 10분 차이로 우리나라 사법시험의 시대가 끝나고 로스쿨의 시대가 열렸다. 이렇게 새로운 법조인 양성 체계가 만들어 내기까지 김영철 변호사는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이 한번 믿는 것에 대해서는 강직하다고 할 정도로 투철한 신념을 발휘해왔다. 그러다 보니 그는 검사 시절에서부터 자신만의 엄격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수사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과도한 형량을 받아 억울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범죄자라면 반드시 법의 테두리를 빠져나가는 일이 없이 엄하게 벌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맑아지고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며,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애국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것이 좋기도 했습니다. 법의 판결은 누군가에는 벌을 내리고 제재를 가합니다. 그렇게 심판을 받는 자는 분명 저를 욕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욕을 먹는 것이 올바르고 공정한 법 집행을 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어수선한 현 시국, “결국 국민이 판단할 것”
취재진은 김영철 대표변호사에게 최근 법조계 및 정치권에서 발생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였다.
”법조계의 선배로서 이 부분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국민이 판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론이 분열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늘 다수의 국민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왔습니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북한 인권과 통일, 그리고 국내의 이웃들에게도 눈길을 돌려왔다. 과거 대한변호사협회 북한 인권특별위원회 남북교류협력소위원회 위원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운영위원과 기획 법제분과위원장, 민주평통 탈북지원 법률지원단 고문을 역임했다. 또 제주도민회 부회장, 건국 라이온스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건국대학교 총동문회 특별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함께 잘 살자’라는 정신으로 많은 실천과 기부를 하기도 했다. 사랑의 쌀 기증, 가톨릭 성당 건립기금, 초등학교 어린이신문 보급지원, 구호단체 활동기금, 장학기금, 건국대 발전 기금 등에 힘을 보탰다.
김영철 변호사는 검사와 교수의 길을 거쳐 이제 법무법인 ‘대종’의 대표변호사로서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는 “변호사는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제1의 사명”이라고 강조한다. 대종은 송무와 공증에 역점을 두고 있고, 그 어느곳보다 성실성과 신뢰성을 담보로 하고 있는 변호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김 변호사의 자랑이다.
사회가 혼란하고 국론이 분열될수록 사회지도층이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고, 또 일반시민들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약자를 옹호하고 정의를 실천하려는 김영철 변호사의 활약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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