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비젼 송 콘테스트(Eurovision Song Contest 2026)가 이스라엘 참가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 속에 창설 70년 역사상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유럽 최대 음악 축제로 불리는 유로비전은 그동안 “비정치적 행사”를 표방해 왔지만, 올해는 이스라엘의 가자전쟁과 중동 정세가 대회를 집어삼키며 음악보다 정치 논란이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올해 대회에는 아일랜드, 스페인 , 슬로베니아, 네덜란드,이이슬란드 등 5개국이 이스라엘의 참가 지속에 반발하며 공식 보이콧에 나섰다. 이로 인해 올해 개최국인 비엔나에는 총 35개국만 참가했으며, 이는 2004년 이후 가장 적은 참가 규모다.
유로비전은 매년 유럽과 주변 국가 대표 가수들이 출전해 노래 경연을 펼치는 행사로, 지난해 전 세계 TV 시청자만 1억6600만 명에 달했다. 특히 LGBTQ+ 공동체의 대표적 문화 축제로 자리잡아 왔으나, 올해는 축제 분위기가 크게 위축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예년 같지 않은 분위기”…팬들 발길도 급감
아일랜드 유로비전 팬클럽 회장 프랭크 더모디는 한 인터뷰에서 “평소라면 약 800명의 아일랜드 팬이 개최 도시를 찾지만 올해는 40명 정도만 방문했다”며 “다른 나라 팬들도 안전과 분위기를 우려해 방문을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결승전 티켓이 아직 판매 중인 상황도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유로비전 결승전은 통상 수개월 전에 매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스라엘 참가 둘러싼 갈등 격화
논란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참가 여부다. 이스라엘은 가자전쟁 이후 지난 2년간 유로비전 참가 과정에서 거센 반발에 직면해 왔다.
유럽방송연맹(EBU)은 지난해 12월 회원국 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국 이스라엘 참가 여부에 대한 공식 투표는 실시하지 않았다. 대신 “신뢰와 투명성, 정치적 중립성 강화를 위한 규정 개정”만 발표했다. 이에 반발해 일부 국가들이 보이콧을 선언했다.
논란은 이스라엘 정부가 지난 대회에서 조직적 온라인 투표 캠페인을 벌였다는 의혹으로 더욱 커졌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최근 조사 보도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가 유로비전을 소프트파워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조직적 투표 전략을 전개했다”고 전했다.
기존 규정상 한 사람이 최대 20번까지 투표할 수 있었는데, 소수 인원이 대중 투표 결과를 좌우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에 EBU는 올해부터 개인당 최대 투표 횟수를 10회로 축소했다.
또 EBU는 이스라엘 대표 가수 노암 베탐(Noam Bettan) 측에 “이스라엘에 10번 투표해 달라”는 문구가 포함된 홍보 영상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고 밝혔다.
공연장서 “학살 중단” 외침
이스라엘 대표 노암 베탄이 준결승 무대에 올랐을 때 관객석에서는 “집단학살을 멈춰라”라는 구호와 야유가 터져 나왔다. EBU는 “마이크 근처에 있던 한 관객이 공연 시작 직후 큰 소리로 정치적 발언을 했고 이후 보안요원에 의해 퇴장 조치됐다”고 밝혔다.
베탄 역시 BBC 인터뷰에서 “야유와 항의 소리를 들었다”며 “순간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예술계도 찬반 양분
이번 사태는 국제 문화예술계까지 갈라놓고 있다. Brian Eno, Massive Attack, Peter Gabriel 등 2100명 이상의 예술인은 공개서한을 통해 이스라엘 참가 반대를 선언했다.
반면 Helen Mirren, Amy Schumer 등 1000여 명은 별도의 서한을 통해 이스라엘 참가를 지지했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는 “이스라엘의 참가 지속은 가자지구 상황에 대한 국제적 비판을 희석시키는 플랫폼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스라엘 정부는 집단학살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방송사들도 독자 편성
보이콧 국가 방송사들은 대회 중계를 거부하거나 대체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다.
슬로베니아 국영방송 RTV는 ‘팔레스타인의 목소리’라는 특별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방영 중이며, 아일랜드 RTÉ는 인기 시트콤 ‘Father Ted’의 유로비전 특집 에피소드를 대체 편성했다.
유로비전 전문 콘텐츠 제작자 게이브 밀른은 “이번 사태는 EBU와 참가국들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분리됐음을 보여준다”며 “대회 운영 구조와 의사결정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래도 무대는 계속된다. 정치 논란 속에서도 유로비전 특유의 화려한 무대는 이어지고 있다.
보이 조지(Boy George)가 산마리노 대표 무대에 깜짝 등장했고, 핀란드 대표 린다 람페니우스와 피트 파르코넨의 일렉트로팝 곡 ‘Liekinheitin’은 우승 후보로 꼽히고 있다.
또 그리스 대표 아킬라스는 전통 악기와 게임 음악 스타일을 결합한 퍼포먼스로 주목받고 있으며, 프랑스의 17세 가수 먼로는 오페라풍 발라드로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오랜 팬들은 올해 유로비전이 예년과 다른 분위기라고 입을 모은다.
프랭크 더모디는 “유로비전은 유럽에서 가장 독특한 공동체 문화”라며 “광기와 자유, 다양성과 환대를 상징해 온 축제가 정치적 갈등으로 사라진다면 매우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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