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정부의 IRA(인플레이션감축법) 시행 이후 완성차업체와 합작투자로 공격적인 설비증설을 추진해왔던 K배터리가 브레이크에 발을 올려놓고 잠시 쉬어간다.
올들어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현상이 현실화하자 K배터리의 파트너사인 국내외 전기차업체들이 생산량 조절에 나서며 전방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자, 투자의 속도조절에 나선 것이다.
여기에 현행 IRA에 근거한 보조금 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이 커진 것도 K배터리의 미국 투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바이든 정부의 전기차 육성 정책 자체에 부정적인 트럼프 캠프는 이미 집권하자마자 보조금 정책 변화와 고율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는 카드를 만지작 거리고 있다. K배터리의 미국 투자에 새로운 돌발 변수가 생겼다는 얘기다.
◆LG, 애리조나 LFP공장 이어 렌싱공장 건설 중단
K배터리의 간판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이 먼저 결단을 내린 것으로 파악된다. LG엔솔은 미국 간판 자동차기업 제너럴모터스(GM)와 합작 설립한 얼티엄셀즈의 미시간주 랜싱 3공장 건설을 최근 일시 중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얼티엄셀즈 3공장은 총 26억달러(약 3조6천억원)가 투입되는 LG엔솔의 미래 전기차 배터리 생산기지로 투자가 진행돼왔다. 예정대로라면 올 하반기에 기본 건물을 준공, 내년 초 1단계 양산을 시작해 연 생산 규모를 50GWh(기가와트시)까지 확대할 계획이었다.
LG엔솔은 얼티엄셀즈 3공장을 총 5개 라인을 구축한다는 목표 아래 현재 2개 라인의 일부 장비 반입이 이뤄진 상태에서 나머지 3개 라인에 대한 장비 발주 일정을 잠정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장비업계에 따르면 얼티엄셀즈 3공장의 배터리 양산 일정이 연기되면서 장비 공급이 보류된 상태이며 일부 반입된 장비 셋팅이 진행 중인 상황에 추가 작업마저 전격 중단됐다.
LG엔솔 입장에선 전기차 캐즘에 의한 전방 시장의 수요 둔화와 최근 총격피습으로 트럼프의 집권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자, 부득불 설비투자에 급제동을 건 후 업황에 따라 설비투자 계속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LG엔솔은 앞서 최근 애리조나주의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전용 생산 공장 건설을 착공 두 달 만에 일시 중단한 바 있다.
사실 배터리 전방 시장 상황은 녹록지 않다. 글로벌 전기차업체들은 최근 앞다퉈 전기차 생산량 감축에 나섰다. 일부 업체들은 내연기관차 투자를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LG엔솔의 전략적 파트너인 GM만해도 올해 전기차 생산량을 이전보다 5만대 적은 20만~25만대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포드는 전기차 대신 내연기관차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혔다. 전기차 전업업체인 테슬라도 멕시코 공장 신축 계획을 늦췄다.
◆K배터리3사 전반에 불똥...투자재개 당분간 불투명
업계 선두주자인 LG엔솔이 선제적으로 미국 설비투자 속도조절에 나섬에 따라 그 불똥은 SK온과 삼성SDI로 옮겨붙을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선 현대차그룹이 LG엔솔, SK온과 각각 구축 중인 배터리 합작공장 투자에도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SK온은 최근 국내 장비 협력사에 현대차 합작공장에 공급될 배터리 제조장비 생산을 일시 보류해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작년말 SK온으로부터 구매주문(PO)을 받고 공급을 준비해온 장비업체들로선 난감한 입장이다. LG엔솔이 현대차와 짓는 합작공장 역시 장비 입찰 일정이 지연되고 있다.
GM과 삼성SDI의 배터리 합장 공장 설립도 GM의 전기차 생산량 감축에 따라 일정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GM과 삼성SDI는 인디애나주에 연 30기가와트시(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구축해 2026년 가동할 예정이었다.
K배터리의 미국 투자 재개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전기차 수요 둔화와 미국 전기차업체들이 중국의 파상적인 저가 공세에 밀려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EV볼륨스에 따르면 지난달 미국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3% 하락했다. 미국 전기차 판매량이 역성장한 것은 30개월 만이다. EV볼륨스는 올해 글로벌 EV판매 예상치도 1650만대로 지난 4월 예상치보다 5만2000대를 줄였다.
트럼프 리스크도 갈수록 표면화되고 있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재집권시 IRA 폐기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결과에 따라 미국 내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 투자의 매릿이 없어질 수 있다. 업황도 불투명한데 IRA보조금마저 없어진다면 굳이 미국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할 이유가 없다.
설상가상 트럼프캠프는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를 이유로 전기차와 배터리에 대한 세제혜택마저 크게 줄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대미 무역흑자의 상당부분은 반도체와 친환경차에서 나온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미국이 트럼프 캠프의 공약대로 보편관세 10%를 한국에 부과한다면 대미 수출이 152억달러(약 21조원) 감소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처럼 현재까지 드러난 여러가지 돌발 변수가 모두 현실화된다면, K배터리의 미국 설비투자는 잠시 쉬어가는 게 아니라 전면적인 재조정이 불가피해질 수 있다. IRA의 시행과 친환경차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소위 '디커플링'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으로 기대됐던 K배터리가 잇단 암초가 가득한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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