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세우고 평생 그것에 몰입할 때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낙수가 바위를 뚫는다는 말로 비유한다.
경기도 파주시 금촌1동 939-22의 이익선 前(전) 경민대 교수(법학박사. 48)를 보면 그 말이 연상된다. 지금은 대학 강단을 떠나 조용히 자영업을 하면서 지역사회에 유익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법학박사에 대학교수라고 하면 대개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공부만 하다가 그렇게 된 줄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박사가 살아온 인생역정을 들어보면 한편의 드라마 같은 느낌이다.
이 박사는 파주 연풍리(용주골)시골에서 지지리도 없는 가정의 4남 5녀중 3남(7번째)으로 태어났다. 농토라고 한 마지기도없었고 돼지 2∼3마리 키우는게 고작이어서 재래시장 생선가게와 음식점에서 잔반을 수거, 돼지우리에 밥 갖다주는 것은 어릴적 이 박사의 담당이었다.
부친은 무직으로 사망할 때까지 이렇다 할 벌이를 하지 못해어머니가 큰 플라스틱 대야에 김밥 및 닭발을 싸들고 문산 시내에 가서 행상으로 야식장사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당시 용주골에서 문산까지 가는데는 성인남자 걸음으로도 2시간 이상 걸렸는데 여성이 머리에 플라스틱 대야를 이고 한밤중 30년을 걸어다니며 장사를 했다.
모친은 밤 9시반에 나갔다가 장사마치고 택시비 아끼려고 걸어오면 새벽 3∼4시가 됐다. 모친이 장사하러 나간 동안 동생들밥 챙겨먹이는 것은 이 박사의 몫이였다. 이 박사의 두 형은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
이 박사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항상 꿈을 잃지 않고 중2 때부터 지덕노체(知德勞體)를 강조하는 4H클럽에 가입해 각종 봉사활동을 하며 마을독서실, 공부방, 유휴지활용 등을 하는데 앞장섰다. 그 결과 마을이 1982∼1983년 파주군 1등과 경기도 3등모범4H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성적도 우등상을 받는 상위권이어서 대학이나 다른 분야로 진출할 수도 있었음에도 율곡고교 2년(18세) 재학 중 국가에서 고교 3년간 전학비를 지원받고 하사관으로 7년간 근무를 하는 조건의 군 하사관 장학생을 지원 군위탁장학생으로 선발, 고교졸업 후 곧바로 군에 입대하였다. 그 바람에 자식의 학비를 대줘야하는 부모님 걱정거리는 덜게 됐다.
16살 고교에 진학하면서 부터 이 박사는 직업군인으로서의 인생이 시작된 셈이다. 이 박사는 40년간 자신을 지탱해준 것은어릴 때 4H에서 익힌 지적노체 정신이었다고 말한다.
고교를 막 졸업한 19살 때인 1984년 하사로 입대해 포반장 및관측대행 하사관을 했다. 1985년말 보안사에 배치돼 강원도 화천에서 당시 GOP추진 방책선 공사장인 철책에 투입되어 4년여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근무를 하였다.
1991년2월에 이르러서야 화천시내 근무를 하면서 이때 화천출신 부인과 만나 가정을 꾸렸다. 화천에서 대공업무담당관으로근무할 때는 민-군 간의 의견마찰이 생겼을 때는 웬만하면 민간경제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유연하게 업무처리를 해주어 더러오해를 사기도 했다고 한다. 결혼 1년만인 1993년 4월 다시 고양시(9사단)로 전출됐고 그곳에서 근무하다가 2004년 6월30일예편했다. 만 20년 군복무를 해야만 연금수령자가 될 수 있었기에 그때까지 복무한 것이다.
이 박사는 1999년 고양시에서 근무하면서 군위탁생으로 의정부 소재 경민대 부동산경영학과 전문대과정에 입학했다. 전문대과정까지는 국가에서 학비를 지원받아 다녔다.
군생활이 안정되면서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재미가붙자 2년이라는 시간은 후닥 지나갔다. 당시 경민대는 전문대였기에 졸업 후 포천에 있는 대진대 법학과 3학년으로 편입해법학사 학위를 땄다. 근무처에서 학교까지 통학하는 데는 하루
왕복 3시간이 걸렸다. 거기다가 밤 7시부터 3시간 이상 강의를듣고 귀가하면 밤 12시∼새벽 1시가 됐다.
대진대는 사비로 다녔는데 법학사 학위를 받으니 석사에 도전하고 싶어 다시 대진대 법무행정대학원에 들어가 민법(부동산법제)을 공부하며 학위를 따냈다. 석사논문은 군사시설보호법에관한 사항으로 지역주민의 재산권행사를 제한하는 측면이 있어소규모 건물은 군동의 없이도 지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골자였
다. 군인신분으로 군지침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자료를 찾는게부담스러웠지만 낙후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논문을 완성하였고, 그후 국방부에서 군사시설보호법을 크게 완화시켜 이 박사의 논문주장의 일부가 반영되어 지역주민들의 재산권 행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 박사는 내친 김에 박사를 꿈꿨고 대진대에박사과정이 없어 파주지역에서 지근거리에 위치한 국민대 대학원을 선택해 민법을 전공했다. 박사논문도 징발재산의 환매-원상회복에 관한 것으로 군의 징발이 재산권자에게 재산피해가 최소화 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중점으로 연구하여 5학기만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박사는 20년간 하사관으로군 생활을 하면서 쉼 없이 공부해 한식-양식조리사 자격증도 획득했고 법학박사 취득 후인 2011년 8월에 학점은행제로 사회복지사 학사학위도 땄다.
이 박사는 법학박사 취득 후 경민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였고 2008년부터는 부동산경영학과 전임교수로 강의하다가 얼마못가 그만뒀다. 군인 연금법 상 현실성이 떨어지는 사립학교 교직원에 취업이 되면 군인연금 100%를 수령할 수 없다는 법규가 적용되어 연금을 줄 수 없다고 통보해온 것이다. 연금을 절대 포기할 수 없어 보수가 얼마 안 되는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기로 했던 것이다. 주경야독 10년으로 취득한 박사학위인데 강단에 서지 못하는 허탈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지금은 지역에서 민·형사 사건 등에 대해 무료 상담해주며 지역민들에게 봉사하고 있다. 파주시 족구대표 선수로 뛰게 됐고 파주시족구연합회 사무국장 4년을 거쳐 현재 6년째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주시 족구회원은 어림잡아 1천여명이고 등록회원만 6백 명에 이른다. 열악한 족구 환경속에서 파주시 족구팀은 경기도대회에서 5번은 공동3위, 4번은 2위로 입상했다.
이 박사는 군에서 익힌 조직관리 능력을 발휘해 족구연합회도체계를 잡았다고 한다. 2004년부터는 기무사출신이라 자유총연맹 청년회장을 맡게 됐고 지금은 고문으로 있다. 전주이씨라문중에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전통제례보존 파
주지역 총무이사를 맡았다. 이 행사는 문화재청에서 주관하고전주이씨들이 제례를 이행하고 행사를 기획하는데 이 박사가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역인 10여명이 <소나무장학회>를 만들어 조손가정, 이혼가정 자녀들이 중학교 진학할 때 필요한 곳에 사용하도록 장학금을 지원한다. 2년째 회원 1인이 매년 20만원씩을 부담해 지역내 금향-금촌초교 졸업생 5-10명 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한다. 2006년 10월에 국제로타리클럽인 파주통일로타리클럽에 가입했다. 2009년 총무, 2011년 클럽관리위원장하면서 필리핀 자매클럽 <테이테이 에스칼런클럽>과 합동으로 라잘지구에장애인학교 건물 1동을 지어주고 사무집기 등도 공급했다. 그밖에 위생적인 물을 위해 3개교에 식수대를 지원하고, 코피노(한국인-필립핀 혼혈아)센터에 의료품과 의류 등 식료품을 지원한다.
파주지역에서는 독거노인 집수리, 보일러교체, 소년소녀 가정돕기 등을 하고 관내학생들 3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가야금을 잘 타는 탈북자 학생이 있어서 2∼3년째 후원해오고 있다.
이 박사는 대한민국일등봉사대(카페 있음) 자문위원이기도 한데 여기는 인터넷으로 연락한 회원들이 도움이 필요한 지역을
찾아가 자연재해 복구, 맹인가정 도배 및 대청소를 하기도 하고 또 <기독교 열린봉사대>와 연계해서 어려운 독거노인들에게 김장봉사도 한다.
청소년보호시설을 방문해서 원생들과 레크리에이션으로 함께하는 오락봉사도 한다. 이런 활동으로 이 박사는2012년 우수자원봉사자로 선정되어 이인재 파주시장으로부터 우수자원봉사상을 받았다. 뜻한바 있어 경민대 다닐 때 기독교에 귀의했다. 인생관은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군 생활에서 터득한“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자세로 남에게 피해 안주고 좋은 일 많이 하는 것이다. 물질보다 재능으로 봉사하겠다는 생각이며 더불어 함께 하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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