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원양복점 전병원 대표/ 패션디자인 명장
최고의 기능과 복식이론 겸비한 전인적 대한민국 양복명장
개인의 특수 체형에 맞는 주문 양복에 강해, 전국의 손꼽히는 양복장인들
찾아다니며 직접 사사받은 실력
‘장인’이란 낱말이 일반에게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쉽게 명성을 얻으려하거나 조급하게 성과를 올리려 하지 않고 최종적 목표를 향해 자기 신뢰로 무장하고 수도하듯 묵묵히 갈 길을 지향하는 심지 굳은 사람, 결과 성취를 하고 나서도 태도에 변화없이 본래 자신의 할 일에 충실한 사람. 장인들에게는 흔히 ‘경지’라는 수사도 사용한다. 같은 길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앙모’의 감정도 있을 것이다. 광주에서 전병원양복점을 운영하며 올해 대한민국 양복명장의 반열에 오른 전병원 대표는 이런 이미지를 과히 넘지 않는다. 어린 나이인 지난 71년에 남성양복 업계에 입문한 후 40년 넘는 세월 동안 그는 장인이 가지는 외곬 정신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걸어왔다.
오랜 도전 끝에 마침내 대한민국 양복명장 반열
광주 충장로에 위치한 남성양복 전문점인 ‘전병원 양복점’은 패션브랜드에 고급 기성복들이 등장하기 전, 맞춤 양복점에서 풍겼던 고풍과 단정한 격식과 자부심이 배어있다. 갈색조의 진열 간에 층층이 올려진 피륙들도 단정해서 심지어 위엄마저 있어 보인다.
이 양복점의 전병원 대표는 올해 ‘패션디자인’부문의 명장이 됐다. 그동안 2년에 한 번씩 명장 등용 시험이 있었고, 2010년부터는 남녀 복장이 통합되어서 더욱 선정의 문이 좁아지고 있던 때 여러번의 도전 끝에 명장의 칭호를 얻었다. 기능인으로서는 최고의 명예를 얻었지만 장인으로서 그의 생활은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 오히려 성취감 뒤의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명장이 되어 객관적 평가를 받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교만이 아닌 저에 대한 믿음으로 스스로 자질도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양복에 입문한 후부터 항상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계획을 세워서 걸어왔습니다. 55세까지 항상 도전하는 자세로 2등의 노력을 하고, 그다음 60세까지는 정상에 오르고 이후부터는 제가 가진 것을 사회와 후배들에게 돌려주리라는 마음을 늘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진학을 위해 잠깐 일하겠다는 결정이 한평생의 직업으로
전병원 명장은 중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양복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시골에서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중학교 무렵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자 부모님이 1년만 기다렸다가 진학하자고 위로했다. 1972년도 1월의 일이었다. 중학교 졸업식도 채 하지 않은 때였다.
“그때 저희 어머니께서 시간이 남으면 딴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기술은 언제든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것이니 배우라 하시면서 양복점에 데리고 가셨어요. 양복점에서 막내로 일을 하면서도 저는 거기 잠깐 있는 것이고 진학할 예정이란 생각에 교과서를 끼고 다녔어요. 그랬더니 공장 사람들이 잘난 척한다며 때리기도 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6개월쯤 일을 배우고 있을 때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았다. 마침 화면에서는 세계기능올림픽 대회에서 메달을 받아온 기술인들이 도심의 거리에서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었다. 어린 전병원 대표의 뇌리에 미래를 결정할 한 가지 생각이 영감처럼 떠올랐다.
“집은 어려웠고 공부해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이왕이면 열심히 배워서 금메달을 따보자, 라는 결심이 서더군요. 제가 그때 16살이었고 만 21세면 나갈 수 있었으니 5년만 부지런히 해보겠다는 의지가 솟았습니다.”
자신의 의중을 부모님께 상의하니 두분께서는 ‘기술을 배우는 동안 돈 걱정은 하지 마라, 대신 잘 배워서 좋은 기술자가 되라’고 격려를 해주셨다. 전병원 원장은 특히 항상 엄하면서도 당신 아들의 앞길에 대한 신중한 조언을 해주시던 모친께 감사함을 새기고 있다.
그런데 양복 상하의 모두를 봉제하는데 5년이 걸리고 군대를 갔다오니 연령제한에 걸려 기능대회에는 나가지 못하게 됐다. 군대를 갔다와서는 재단과 패턴을 배우게 됐다.
재단을 숙련한 후 첫 손님에게 받은 충격
양복 재단을 하기 시작한 초년기에 전병원 대표는 바디빌딩 선수의 양복을 재단하게 됐다. 근육질의 굴곡이 많은 가장 재단하기 힘든 체형이었다. 경험과 기술이 아직 완전하지 않았던 그는 어떻게 재단을 해야 할지 고민이 컸다. 어찌 양복을 만들었지만 제대로 맞지 않았다.
“저는 실패를 어떻게든 무마하려고 ‘고객님의 체격이 양복을 재단하기에는 까다롭다’고 변명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 고객이 ‘내가 체격이 평범하면 기성복을 사 입지 왜 여기 왔겠느냐?’ 반문하는 겁니다. 정말 얼음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바짝 들었어요. 그때 양복재단을 하면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지요. 그다음부터는 어떤 체형을 가진 고객이 와도 모두 맞추겠다는 생각으로 전념합니다.”
그래서 전병원 명장은 자신의 기능 중 가장 탁월한 점을 이상체형이나 변형제형에 맞게끔 옷을 재단하는 일이라고 한다. 또 눈에 뛸 정도의 신체 이상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신체특징을 보완해 주면서 재단하는 일에도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고객들이 가끔 볼때는 옷이 작은가 싶었는데 너무 편하다, 고 말할 때 그것이 칭찬이라고 한다. 입어서 편한 것이 좋은 옷이기 때문이다.
양복점 직원으로 재단일을 하면서도 전병원 명장은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단지 기능인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면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일주일 동안 출석해야 할 때는 양복점의 휴일을 반납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양복점을 차리기까지 일년 내내 휴일이 없는 시간을 보냈다. 독신이었을 때는 괜찮았으나 결혼하고 나서는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근처 공원에도 못간 것이 지금도 미안하다고 한다.
장인으로 소문난 양복 선배들 찾아다니며 배워
봉제를 배울 때는 몰랐던 새로운 배움의 세계가 재단과 패턴을 익히고 고객과 직접 만나면서 전병원 명장에게 새로운 과제가 부과됐다.
“그때까지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님과 직접 만나면서 끊임없이 기술에 대한 문제들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명하신 양복 장인들에게 '이런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고 싶다’라는 내용으로 일일이 편지를 써서 찾아다녔어요. 한참 어리고 실력이 모자란 젊은이의 혈기 하나로 부탁드린 것이지요.”
역시 한 분야에 몰두한 사람들은 연륜과 함께 인격이 깊어지는 법이다. 찾아가는 장인들마다 전병원 젊은이를 박대한 사람은 없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기술은 자식한테도 비밀로 하는 법이잖아요. 그런데 원로 선배들이 하대하거나 짜증도 안내시고 재단 도구들을 펼쳐놓고 일일이 세심하게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정말 황송했지요. 그런데 제가 나이가 들어 제자들이 무엇을 물어오면 있는 것 모두를 다 가르쳐주고 싶은 특별한 마음이 있어요. 아마 그분들도 저를 그렇게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분들은 충분히 자격이 있으신데도 명장에 도전하지 않으시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만 일하시는 분들입니다.”
대통령들의 양복을 전담하다시피 해온 그 유명한 세기 양복점의 윤인중 선생은 당시 젊었던 전병원 명장을 ‘영광촌놈’이라 귀여워했던 기억으로 60이 다돼가는 지금도 같은 별칭으로 부른다고 한다. 그때 양복에 대한 철학도 같이 배우게 됐다. 선생님들은 자신만의 패턴과 선(線)을 가져야 한다면서 스스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도 가르쳐줬다. 그것은 보통사람은 모를 수도 있는 기예(技藝)의 경지였다고 한다.
한국 양복 변천사 100년 전시회 사비로 열어
1987년 비로소 자신의 양복점을 연 전병원 원장은 하루 35벌의 주문을 받을 정도로 잘나갔다. 몇 년 후 경제력이 쌓이자 그는 돈을 버는 양복에서 벗어나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1993년 그는 사비를 털어 ‘양복변천사 100년 전’을 서울, 광주, 부산 등지에서 열였다. 서재필 박사가 입었던 양복도 수집했고 고증을 통해 각 시대별로 50벌의 양복을 별도 제작했다. 시대와 연결된 사회사까지 포함했다. 안타깝게도 중간에 양복점에 화재가 나서 그때 전시품들이 대부분 소멸했지만 좀이 쓴 1930년대의 원단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전병원 명장의 남은 꿈은 자신이 가진 기술과 이론을 서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는 기술서적에 필요한 자료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는 양복을 도제식으로 배우기 때문에 기술서적이 적습니다. 직접 시연은 하지만 이론적 설명은 부족해요. 제가 그동안 모든 자료와 저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술서적을 출판할 계획입니다. 양복기술을 후배들에게 되돌려주는 일이기도 하지요. 남성복 기술이 2-30년 동안 침체기에 있었지요. 제가 막내에 속합니다. 다시 남성양복기술을 부흥시키고 싶어요.”
그래서 90년대 후반에는 바쁜 일정 중에도 광주대에서 남성복 강의를 하기도 했고, 최근에도 특강에 열심을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 양복 명장 브랜드’로 중국 진출 모색
나아가 그는 더 원대하게 중국시장 진출도 꿈꾸고 있다. 중국이 급격히 개방화, 소비화되면서 인민복에서 기성복을 거치지 않고 고급 주문복으로 이행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년 전부터 ‘대한민국 명장브랜드’로 경제인들과 함께 시장조사를 하고 있다.
지난 1998년 ‘국회 옷로비 사건’으로 청문회가 있었을 때 전병원 명장은 옷이 고유의 기능을 벗어나 일탈된 뇌물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현실을 목도하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당시 활약을 한 우수국회의원들에게 양복을 지어 보냈다. 몸에 잘 맞는 옷이 편안하듯이 정치 잘하면 국민이 편안하다는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한다. 양복을 단순히 기능의 정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의복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와 연결지어 생각할 줄 아는 전병원 명장이야말로 옷의 진정한 가치와 균형을 아는 전인적 인물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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