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미국은 일본을 내세워 중국을 견제하고 동아시아를 ‘팍스 아메리카나’의 자장 안에 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가 깨진 것이 바로 ‘미중 수교’였다. 이후 중국과 일본도 대화의 물꼬를 트고 일시적으로 가까워지는 듯했으나, 잊을 만하면 역사 문제가 불거져 관계는 악화되고 회복되기를 반복했다.
역사 문제에 대한 중일 간의 인식 차, 과거사를 지우고 다시 우경화의 길을 걸으려 하는 일본, 그런 일본을 비난하는 동시에 폭발적인 경제성장으로 아시아의 1인자로 우뚝 선 중국, 그리고 이들 양국에 대한 전략을 수정해가면서 동아시아를 여전히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미국. 이처럼 지난 70년간 동아시아는 여러 강대국이 펼치는 패권 경쟁의 장이었다. 호주 출신 언론인 리처드 맥그레거가 지난 8월 말에 출간한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메디치미디어)는 이러한 동아시아의 패권 경쟁에 대해 심도 있게 다뤘다. 주제별로 핵심 내용을 분석한다.
(1) 중국-일본의 과거사 문제
사실 오늘날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상황은 결코 갑자기 벌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을 즈음, 오랜 시간 서로를 냉랭하게 대했던 중국과 일본도 새로운 관계를 모색했다. 지금과 달리 처음에는 오히려 일본이 적극적으로 과거사를 사과하려 했으나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했던 중국은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고 일본의 경제적 원조를 끌어내려 했다.
그런데 중국의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일본을 추월할 조짐을 보이면서 관계가 역전이 돼고 말았다. 이후 중국은 기회가 될 때마다 난징대학살을 비롯한 전쟁 피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태도를 바꿔 과거사를 지우고 자신들이 전쟁의 피해자로 비춰지길 바랐다. 바로 이것이 중국과 일본 관계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이 관계를 원만히 하려 노력할 때마다 결국 역사 문제가 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과 위안부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오늘날 한일 갈등의 원인과 기원이기도 하다.
(2) 일-중-미,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랜 시간 일본이라는 방어선을 내세워 동아시아를 팍스 아메리카나 질서 아래 두고 통제해왔다. 그러나 닉슨과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이 체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후 미국이 두 나라 사이에서 입장을 바꾸면서 새로운 패권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한중일 삼국의 관계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미국은 중국을 겨냥해 총을 겨누고 있다. 중국은 일본과 미국을 동시에 위협한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본은 미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이 삼각 구도를 완성한다. 일본이 미국을 저버리거나 미일 동맹을 격하한다면, 중국과 충돌할 때와 마찬가지로 전후체제는 뒤집힐 것이다. 이 삼각 치킨게임에서는 누군가 무기를 발사하는 순간 모두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아시아 미래의 열쇠를 중국이 쥐고 있듯이 중국의 열쇠를 일본이, 일본의 열쇠를 미국이 쥐고 있는 셈이다.”
(3) 미국과 동아시아의 역사
더구나 저자는 아시아의 역사에서 미국의 인식이 매우 중요했으며, 또한 오늘날의 패권 경쟁을 일으킨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아시아 역사를 등한시한 것은 실수였다. 결국 미국도 아시아 역사에서 발을 뺄 생각이 없었으며 최근까지는 쉽게 그럴 수도 없었다. 역사는 소수 엘리트가 흥정을 벌여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일본이 전쟁 때 저지른 과오는 지금까지도 동아시아 정치에 독혈(毒血)로 흐르고 있다. 게다가 미국으로서는 역사 문제로 일본을 압박하기가 조금은 곤란했다. 일본에 원자폭탄을 2개나 투하하고 도쿄 대공습으로 하룻밤 사이에 도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국가였기에, 괜히 과거사를 들쑤셨다가 자신들의 행적까지 재조명받기를 원치 않았다. 따라서 불안정한 전후 세계에 안정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히로히토의 천황 지위를 그대로 남겨둔 것이었다. 미국의 이러한 방침은 일본의 잘못이 없다고 믿거나 굳이 과거를 고통스럽게 반성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일본 보수층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로 수십 년이 흘렀지만, 일본은 전쟁 직후 자신들의 행동을 제대로 책임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전히 과거사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다.”
(4) 중국이 미국을 이겨야 하는 이유
더불어 향후 중국이 미국을 밀어내려고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 유일 패권국이었을 때 중국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싶다는 야망을 숨긴 채 자신들의 지배력을 주변 국가와 해역까지만 확장하려 했다. 중국이 이웃 국가들에 자주 상기시킨 바대로, 아시아에서 미국의 존재는 지정학적 선택이었으나 중국의 존재는 지정학적 현실이었다. 1990년대 이후로 중국은 인접한 14개국과 체계적으로 국경 협상에 착수했고 대부분 성과를 거뒀다. 해상 국경을 둘러싼 분쟁은 훨씬 더 까다롭게 전개되었다. 중국이 과한 요구를 하고 너무 많은 이웃 국가와 충돌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시아를 장악하기 위해 중국은 미국을 먼저 밀어내야 했다.”
동아시아에서 여러 나라의 입장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각국의 지도자들이 과거사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또한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미국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어쩌면 동아시아의 평화는 요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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