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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칼럼] 어머니 집, 어머니 문패

조용준 조선대학교 건축학과 명예교수

1970년대 초반까지만 돌아보면 바라볼 수 있는 대한민국 농촌의 주거문화인 초가집 사진=데일리뉴스DB
1970년대 초반까지만 돌아보면 바라볼 수 있는 대한민국 농촌의 주거문화인 초가집 사진=데일리뉴스DB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 농촌은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우리 고향 집도 마찬가지였다.

지붕은 볏짚으로 엮어 덮었고, 부엌에는! 나무로 불을 피워 밥을 하고 방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아궁이가 있었다. 화장실은 작은 지하 공간처럼 땅을 파거나 큰 항아리를 묻고 그 위에 판자나 나무를 걸치는 재래식으로, 인분이 차면 퍼서 비료 대용으로 논에 뿌리곤 했다. 

가을이면 지붕 위에서 오래된 볏짚을 걷어내고 새로운 볏짚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부엌에는 항상 아궁이에 불을 피울 수 있는 나뭇가지 더미가 놓여 있었고, 벽이나 천정은 아궁이 불티로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화장실은 본채에서 떨어져 있어 자식들이 밤에 용변을 보러 갈 때는 늘 어머니가 호롱 볼을 들고 서서 기다리곤 했다.

어머니는 이런 환경과 엄한 시집살이 아래서 새벽부터 어둠이 내리는 저녁 무렵까지 농사일을 했다. 대식구의 밥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반찬을 만들고,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집안청소와 손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물론이고 새참을 만들어 농사현장에 내는 일도 어머니 몫이었는데, 농촌의 어머니들은 대부분 그러한 삶을 살았다.

이후 정부가 지붕과 부엌 개량을 지원하면서 초가지붕은 슬레이트나 기와 지붕으로 바뀌었고 부엌에서는 연탄을 사용하면서 어머니 고생은 조금 줄었지만, 가난하고 고달픈 삶은 여전했다. 그 무렵, 우리집은 초가집을 쓸어내고 기와집을 지었다. 김용택 시인의 글 ‘아름다운집, 그집’에 나오는 것처럼 아버지는 우리 산에서 곧은 나무를 베어 말렸다가 목수를 불러 지금의 집을 지었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흙을 지붕 위로 올리고 기와로 덮었다. 벽은 시멘트 벽돌로 쌓고 대청마루는 소중하게 보관해온 오동나무를 깔았다. 집을 짓는데 부모님의 피와 땀이 모두 들어 갔고, 그래서 부모님에게 이 집은 아주 소중했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같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의 우리 주거문화 이야기다. 

우리 형제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고, 아버지도 그 집의 큰방에서 임종한 후 나무를 베어 왔던 그 산에 묻히면서 어머니는 20여년 가까이 혼자 사셨다. LPG 연료화와 자동 밥솥 덕분에 부엌은 식당이 됐고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바뀌었다. 농사일도 기계화되면서 어머니 노동은 크게 줄었고 삶에도 약간의 여유가 생겼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임종한 그 방에서 홀로 밥을 먹고, 홀로 잠을 자며 외로운 삶을 사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식들 집에서 하룻밤도 자지 않으려고 한 것도 그 집을 비워서는 않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듯하다.

혼자서 바깥 출입이 어려워지셨지만 홀로 사는 삶은 변하지 않았다. 집에는 주인 없는 동네 고양이 세 마리 뿐이었다. 먹을거리 관리를 소홀히 하면 어김없이 고양이들이 낚아채간다고 욕을 하면서도 어머니는 먹을 것을 주곤 했다. 가정경제에 보탬을 줬고 어머니 추억이 깊게 담겨 있던 집안의 늙은 감나무도 벼락으로 넘어지면서 밑동을 베어냈다. 말년에는 6·25 때 아버지가 당신의 오빠가 근무하던 지서 옆으로 피난 간 이야기, 등에 세살 먹은 자식을 업고 머리에 쌀을 이고 시신들이 널려 있던 먼 산길을 걸어가 아버지에게 식량을 주고 오던 이야기, 돌아오는 길에 배고프고 다리에 힘이 없어 산속에서 주저 앉았던 이야기, 딸을 낳았다고 구박받았던 이야기, 자식들 결혼시킬 때 이야기 등을 하시곤 했다,

정년을 하고 고희가 된 자식에게 “얻어 먹으면 안된다“며 꼬깃꼬깃 접은 돈을 주던 어머니, 입버릇처럼 너무 오래 살아서 부끄럽다면서도 아버지 제사를 지낸 후 떠나고 싶다던 어머니는 그 제사를 한 달 남겨두고, 외국에서 급히 귀국한 손자 손녀들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병실에서 운명하셨다. “나를 살리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그리움과 후회를 안기고 떠나셨다. 아버지 임종 후 집 마당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1년간 식사를 차리던 어머니는 장례식장에서 바로 그 산 아래 밭에 묻히셨다. 농경사회와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가난한 삶 속에서도 자식들 교육을 위해 지독하게 고생을 한 어머니는 그렇게 가셨다. 우리 어머니 뿐이 아닐 터다. 동네 어머니들 대부분이 그러한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가 떠나신 후 시골집에 가면 잠깐 보이지 않던 그 고양이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고서야 고양이들이 어머니의 유일한 친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절을 맞이해 그 집에는 여느 때처럼 자식들이 왔지만, 이제 그 집 주인은 없다. 아버지가 떠난 후에도 본인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달아 드린 어머니 이름의 문패는 대문에 채워진 자물통과 CCTV 설치 알림판 때문인지 더 외로워 보였다. 동네에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빈집이 크게 늘고 있다. 어머니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집이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후손들은 ‘그 집’ 기억이 없다. 

수도권에서는 또 다른 신도시를 건설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출생률이 0.9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는 기사를 보며 힘없는 농촌만이 소멸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지금 농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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