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때론 모호하고 바닥 모를 괴리의 연속이다. 빙하의 균열(크레바스)처럼 이상과 현실, 욕망과 결핍을 가른다. 신은 인간에게 삶의 괴리를 안겨줬지만, 다행히 그 괴리를 메울 수 있는 능력도 선사했다. 상상하는 힘, 판타지다. 보석처럼 빛나는 판타지가 인간사에 즐비하나, 시간의 범주를 여름으로 좁히면 대문호 셰익스피어(1564~1616)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 만한 게 없겠다. 가부장적 강압에 의해 결별할 처지에 놓인 연인들의 운명을 마법의 묘약으로 바로잡는다는 줄거리가 더없이 매혹적이어서다.
독일의 작곡가 멘델스존(1809~1847)이 17년 공들여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극음악으로 빚은 것도 그 판타지의 매력 때문이다. 날아오를 듯 가벼운 목관악기의 선율, 요정의 공중 유영처럼 부드러운 현악기의 화음, 똑똑똑 환상과 동심을 두드리는 금관악기의 리듬 등등. 천상의 소리로 거듭난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은 책갈피를 탈출하는 날개 단 문자처럼 판타지의 자유를 증폭시킨다. 멘델스존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작곡가 슈만은 그 정감을 “요정들이 직접 연주하는 듯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판타지의 매력은 현실이 고통스러울수록 커지는 법이다. 새로운 한류 붐을 몰고 온 ‘별에서 온 그대’ 같은 판타지 드라마나 영화가 성행하는 데서도 그런 삶의 함수를 목격한다. 빈부 격차의 확대, 대물림되는 부와 권력 등 신분제로 굳어져가는 한국 현실.
그리고 안갯속에 갇힌 듯 묘연한 해법 찾기가 판타지에 대한 갈증을 더한다. 특히 사회 지도층의 위선은 시민의 갈증을 자극하는 불쏘시개가 된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내로남불’이 대표적이다. ‘금수저’ 사회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하더니, 특권적 스펙 쌓기를 통해 자신의 자녀를 그렇게 키운 것으로 드러났다. 이 밖에도 폴리페서 축재 등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 행태가 꼬리를 문다. 과거 자신이 했던 말처럼 ‘정치 좌파, 생활 우파’가 되어버린 탓일까. 비판 여론이 빗발치는데도 당사자는 물론 청와대와 여당도 의연하니 납득하기 어렵다. 시민의 상식을 거스르고서도 민주와 정의를 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여름이 끝나면 한여름 밤의 판타지도 썰물처럼 사라질 터이다. 그러나 여름은 결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여름이 물러간 자리에는 판타지를 갈구하게 했던 지리멸렬한 현실이 남아 책임을 추궁할 것이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 한 일을 알고 있다. 왜 그랬니”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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