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의 날들아
용혜원
내 사랑의 날들아
내 가슴에 남아
떠나가지 마라
잊혀지지도 벗겨지지도
씻겨 내려가지도 마라
너를 내 가슴에 새겨두고
녹슬지 않도록 닦고 닦아
찬란한 빛을 내고 싶다
우리 사랑의 깊이만큼
내 몸 깊숙한 속살까지
내 몸 골격 뼈까지
아파도 좋다
간이 저리도록 그리운 것이 있어야
사랑하는 맛이 난다
발이 부르트도록 기다림이 있어야
살아가는 맛이 난다
되새겨보아도 좋을 것이 있어야
여운이 있다
나는 그대 사랑으로만 살아가고 싶다
내 사랑을 남기고 싶다
내 피를 물감처럼 풀어
내 사랑을 그리고 싶다
우리가 저지른 사랑은
때로는 슬퍼도 좋다
내 사랑의 날들아
내 가슴에 남아
떠나가지 마라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암 투병 아내를 17년6개월 동안 한시도 떨어진 적 없이 간호해 왔던 (주)울트라 김덕겸 사장의 순애보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김덕겸 사장이 아내(이순자, 세례명 크리치나)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72년 대학입시에 낙방해 절치부심한 마음으로 재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입시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마음이 무척 삭막하고 한 번의 실패로 인한 상처가 아직 남아 있을 무렵이어서 약간의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입시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렇게 입시 공부에만 전념하던 그에게 아내는 마음의 위안과 여유, 그리고 삶에 대한 어떤 이정표를 받은 것만 같았다.
안녕하셨어요.
뜰에 쌓아논 나무 위에 하얀 눈송이가
살포-시 내려 앉으며 미운 눈망울이
되지 말라고 속삭이는 포근한 오후예요.
그동안 별고 없으신가요?
서신이 늦어져 죄송해요.
공부는 열심히 하고 계세요? 머리도 깎으셨는지요?
모두가 묻고 싶은 말 뿐이군요.
1975년 2월 18일 남원에서 ‘진’
교제할 때부터 아내가 보내준 편지를 그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아내는 지난 10월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사랑하는 그의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마치 친구집으로 다니러 갔다가 곧 돌아올 것만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아내와 항상 붙어 지냈기 때문에 영원히 그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조석으로 변하는 기후에 건강엔 별고 없으신지요?
계신 곳은 이곳보다 기온이 낮으리라 알고 있는데 항상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래요.
늘 염려되오나 저의 성의 부족으로 이렇게 서신이 늦어지곤 한답니다.
전 주님께 빌어주신 덕택에 건강하며 생활에 적응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가끔 지칠 때도 있지만요.
인간의 대열 속에 미분상태인 제 자신이 흡수되어 생활해 나가야만 한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 몰라요.
가끔 허공에 멍울진 울분을 터트려보기도 합니다.
…………………………
주님과 소녀가 항상 곁에서 지켜드리리라 생각하시고 대한 남아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시길 바래요.
그럼 You의 행운과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를…
You를 존경하는 어느 소녀가
1975년 11월 26일
그가 국방의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보내온 아내의 편지는 어려운 군 생활에 대한 활력소였고 그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됐다. 편지에서처럼 아내는 독실한 신자였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주님이 지켜주리라 믿는 것처럼 김덕겸 사장에 대한 믿음과 존경을 변함없이 보내줬다. 그런 아내가 더욱 애틋해 암 투병할 때 지극 정성으로 돌봐줬는지도 모른다. 김 사장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지만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김덕겸 사장은 이순자 씨와 1972년부터 교제를 시작해 약 7년간의 열애 끝에 지난 1979년 결혼했다. 당시 그는 대기업인 한국전기초자(주)에 근무하고 있었고, 아내는 유치원과 미술학원을 경영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렸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아내이면서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던 아내와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냈던 그의 가족에 불행의 파도가 닥친 것은 지난 1993년 6월. 아내 이순자 씨가 유방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때부터 김 사장과 이순자 씨는 암과의 힘겨운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부부간의 사랑과 신뢰, 그리고 암과의 싸움에 끝내 이겨 예전의 단란한 가정으로 돌아가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유방암도 점차 그 기세가 꺾여갔다. 그래서 일말의 희망을 보았고, 곧 완치되리란 확신을 가졌다.
그동안 유치원과 미술학원 경영으로 여념이 없던 아내를 위해 김 사장은 적금을 들기 시작해 1988년부터 호주를 비롯, 대만, 홍콩 등지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또 주말마다 각종 동호인 모임에도 반드시 아내와 함께 나가며 추억을 쌓았다. 김 사장은 그렇게 아내를 아끼며 생의 동반자로서의 소중한 기억들을 한 켜 한 켜 쌓아 놓았다. 이러한 기억과 추억은 그후 그가 아내와의 투병생활을 견디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발병 후 6년이 지난 1999년, 한동안 희망을 가졌던 잠깐의 기쁨도 잠시, 유방암이 척추로 전이돼 하반신마비 상태가 됐다. 아마도 그때가 김 사장에겐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그 전에는 조금씩 거동을 할 수 있었지만, 하반신 마비로 모든 활동이 중지됐다. 그는 서슴없이 20년 동안 근무했던 한국전기초자에서 퇴직을 했다. 오직 아내의 병간호를 위해서였다.
우리 인간은 그의 생에 투자한 노력만큼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농부가 가을을 맞이한 것처럼….
순은 믿고 있어요.
생에 도전하고 있는 겸(謙, 김 사장)의 자세가 결코 헛되진 않으리라고.
모두가 축원해 줄 것입니다.
겸의 곁에는 항상 순아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요.
우리는 다같이 태양을 운전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해요.
1976년 8월29일
김덕겸 사장은 아내가 연애 시절 보내온 편지 내용처럼 ‘태양을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과감한 결단과 함께 아내 곁을 영원히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때부터 그는 아내의 손과 발이 돼 모든 시간을 아내와 함께 했다.
아내가 다짐했던 것처럼 ‘생에 도전하는 자세가 결코 헛되지 않고 모두가 축원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사랑하는 김 사장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 아내의 의지인지는 몰라도 아내는 꽤 오랫동안 병마와 생존을 건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운명은 김 사장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김 사장과 아내의 간절하고도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날로 악화돼 갔다. 척추를 점령한 암 세포는 결국 부신까지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부신은 좌우 신장의 위에 깔대기를 덮어 쓴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는 호르몬 생성 기관이다. 부신은 체내 대사 작용에 꼭 필요한 호르몬을 생성하는 기관으로, 부신 호르몬 생성이 적절하지 않으면 인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생명에 위협을 초래하기도 한다. 4월달에 뇌수술, 그다음 십이지장수술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원자력병원 노후철 과장의 계속된 각종 검사들을 진행, 지켜보는 가족들을 아프게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든 순아가
멀리서만 바라보며 슬퍼하고 있다니 제 자신이 바보스럽고 원망스럽기만 하답니다.
전 어떻게 해야만 하나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졸업식. 마음이 착잡해지는군요.
겸과의 약속을 위해 순은 노력하고 있답니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진 않겠어요.
겸과 순아의 믿음을 합하면 무엇이든지 부딪힐 수 있어요.
1977년 2월 19일
그토록 간절하게 회복을 바라던 김 사장과 가족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아내 이순자 씨는 사랑하는 남편과 형제를 두고 주님의 곁으로 떠났다. 떠나면서도 남겨둔 남편 김덕겸 사장과 자식 걱정으로 한동안 많이 괴로워 했다고 한다. 김 사장은 아내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기필코 자식들을 잘 키워 훌륭한 인재로 자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했다.
김덕겸 사장은 아직도 아내가 곁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집안의 모든 가구와 집기에 아내의 숨결이 묻어 있는 것 같고, 아내의 입김이 서려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는 아내 없이 그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한없는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기도 했지만,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힘차게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그리고 자식들이 엄마를 잃고 방황하지 않도록 더 많은 사랑으로 보살피고 있다.
여보 이순자!
그 환한 미소!
다정한 목소리!
날이 갈수록
깊어가는 그리움에 사무쳐
목이 메입니다.
당신 아호인 유진처럼 소박한 삶을 사시고 생전에 가진 것
다 내어 놓으시며 손수 나으신 두 아들 재형, 재훈!
두 아들(재형,재훈)를 통하여 당신을 느끼고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을 잊지 않기 위해 소중히 키우고 꼭 지켜나가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남편-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