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삶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인생의 가치와 교훈을 얻는다. 그중 자신의 직업에 열성을 바친다. 그것에서 돈오하듯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깨닫는 사람들이 있다. (재)월곡주얼리산업진흥재단의 이재호 이사장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귀금속 분야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힐 즈음, 다른 이를 위해서 사는 것이 곧 스스로의 삶을 위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 이후의 행보는 오로지 자신에게 평생의 직업과 그에 따른 부를 안겨준 귀금속 분야 발전에 공헌하는 일이었다.
산업으로서의 귀금속 분야, 그 안에서 일하고 있는 종사자들의 발전과 향상이 곧 고객을 위하는 일이고, 그것이 자신의 평생 업을 이어가게 해준 세상에 감사하는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평생을 종사해 온 귀금속에 대한 애정과 예의의 결과물
“가난했던 시절 생계를 위해 뛰어든 일이었는데 50년 이상이 흘렀습니다. 고객을 위해 열심히 살다보니 이런 상도 받게 되네요. 제가 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직원들이 뜻을 잘 따라주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은 직원들과 같이 받아야 하는 상입니다.”대한민국디자인대상 시상식장에서 만난 (재)월곡주얼리산업진흥재단 이재호 이사장은 우리나라 귀금속업계에서 수십 년을 일하며 귀금속보석단체장협의회, 귀금속가공업협동조합 이사장 등으로 영향력을 쌓은 인물이면서도 무척이나 겸손한 태도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쌓은 부와 명예를 어떻게 사용해야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지를 정확히 인식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엔 자신의 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부를 일구어준 직업에 공적 책임을 느끼며 막대한 사재를 털어 후대의 앞길을 개척해주는 사람은 흔치 않다. 한 인간의 진가는, 개인의 순수하고 정당한 자아성취를 이루고 난 후 생긴 잉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달려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이재호 이사장을 만나면서 떠올랐다.
(재)월곡주얼리산업진흥재단은 이재호 이사장이 귀금속업계에 투신해 평생을 일군 재산 200억을 출연해 2009년 설립한 공익법인이다. 귀금속 산업 전체의 견인차 역할을 기대하며 세운, 이 이사장 평생의 혼신과 투신으로 전념해온 귀금속업 경험의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사회에서 대기업이 산하 문화재단이나 공익재단을 운영하는 사례는 있어도 개인이 이런 정도의 거액을 투입해서 세운 재단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이 재단에서는 상주 직원 외에 매년 7~80명의 객원 연구원을 위촉하고 귀금속 산업 전 분야에 걸쳐 향후 발전방향에 대한 주도면밀한 계획과 실행에 중점을 두고 있다. 관련 전공학과 학생 300명 정도를 선발해 장학금 혜택을 주면서 그들의 창의력을 조탁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또한 매년 주얼리/ 마케팅/디자인관련 전공 대학 졸업자를 대상으로 30여 명을 선발해 3학기의 브랜드 마케팅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주얼리 브랜드개발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1년에 3억 5천만 원의 장학금이 지급된다고 한다.
“그동안 다른 산업들은 앞질러 가는데 비해 귀금속 산업은 낙후돼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 산업이 좀 더 잘살 수 있도록 해보자는데 나의 미력을 보태고 싶은 겁니다. 내가 이 업계를 반백년 동안 지켜오고 있는데, 우리 산업이 활발하지 않은 것이 꼭 내 책임 같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애써 왔다고 자부하지만 그래도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재호 이사장의 귀금속업에 대한 걱정과 애정은 남달랐다. 그의 표정과 눈빛에서는 사명감마저도 느껴졌다. 단순히 오랜 종사기간 때문에 쌓인 애정의 발로일까. 그에게는 인생 전체의 가치관을 결정하는 중요한 깨달음을 이 직업에서 얻었다고 한다.
생계를 지탱해준 귀금속업, 평생의 가치관을 심어주다
이재호 이사장에게 ‘굶주림’이라는 상황은 우연일 수도 있는 직업 선택을 필연으로 바꾸어 놓은 매개체다. 이재호 이사장의 공적조서 프로필에는 ‘무학’이라고 적혀있다. 가난은 그에게 학교보다는 돈 버는 일을 먼저 요구해 18살에 생계를 위한 노동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잡화점의 일꾼으로 시작한 그의 노동은 성실함에 보답을 받았고, 시계기술을 배워 짧은 시간에 자신의 점포를 가질 수 있게 된 이후로는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번에 걸쳐 도둑이 들어 좌절의 기간도 있었지만 특유의 자립심은 그를 다시 부추겨 세워 새로운 터전을 부산으로 옮기고, 그로부터 15년 세월 동안 가난을 훨씬 벗어나는 정도의 많은 재산이 축적되어 있었다. 그때가 이재호 이사장에게 다가온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다른 이를 위해 살자’는 가치관은 이후의 모든 사업적 구상에서 빠진 적이 없으니 말이다.“굶주림을 탈피하기 위해 이 직업에 뛰어들었는데, 제가 마흔을 갓 넘기면서 어느 정도 경지를 닦고 나니 이제부터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론은 ‘지금까지는 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남을 위해 살자, 행운목이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남을 위해 살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고심하니,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에게 부를 쌓아준 귀금속 고객을 위한 일로 모아졌습니다.”그때서부터 그는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해 준 귀금속 고객에게 보답하는 길을 찾아다녔다. 그것은 우리나라 업계가 향상된 귀금속 기술을 보유하는 일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소중한 정보와 노하우까지 업계에 개방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일일이 열거하기 벅찬 공적들이 그의 행보마다 이루어졌다.
한국 귀금속체인 디자인을 완성시키다
제일 먼저 이재호 이사장이 한 일은 귀금속매장과 제조업체간의 반지 사이즈를 표준화하는 일이었다. 당시는 소매점과 제조업 상호간의 기준이 달라 일의 진행이 비효율적이었다고 한다. 이 이사장은 일본에서 표준게이지를 대량으로 구입해 소매점과 공장에 무상으로 지급했다. 고금을 녹여 골드바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유해가스와 악취가 발생했다. 역시 이 이사장은 수백 번의 실험으로 이를 해결했고, 금 유실량을 줄이는 실험 끝에 고주파로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후에 선진 주얼리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갔을 때, 그들도 같은 주파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쾌재와 함께 자긍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즈음 이 이사장이 가장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선진국에 비해 2~30년이나 뒤져있는 목걸이 체인제조 기술이었다. 우리나라 체인은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했고 디자인은 세련되지 못했었다. 혁신을 강구하지 않는 한 조만간 외국 시장에 잠식당해 버릴 것이란 위기감이 이 이사장의 마음을 짓눌렀다고 한다.
그는 해외여행이 여의치 않던 80년대 중반, 이탈리아 체인회사를 알게 되었고, 두 번의 간곡한 부탁을 통해 드디어 초청장을 받아 단기간 견학을 성사시켰다. 물론 자비였다. 예정보다 2개월을 더 체류하고 기계를 주문해 와 많은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원하는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어 내고 있을 때의 희열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당시에도 이재호 이사장은 이미 업계에서 선두를 구축한 사업가였지만, 전수한 체인기술을 독점한다면 그는 단연 독보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업계를 위해 - 다른 이들을 위해-공장과 기술을 전격 공개했다.
이 이사장 혼자 이렇게 훌륭한 목걸이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보다 다는 사람들도 동참한다면 더 많은 고객들에게 더 좋은 목걸이를 선사할 수 있다는 가치관의 결단이었다. 이후 우리나라 체인기술은 고급디자인과 품질기술을 가지고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고, 현재의 수준에 이르렀다. 이 이사장의 공동체 정신은 사업을 오히려 성장시켜 주었다. 부산에서 ‘금미체인’을 세우고 ‘리골드(Leegold)’란 브랜드를 키우고 있었는데 이탈리아 기술과 기계를 도입해 공장이 확장일로에 있었다.
그의 대승적 결정은 오히려 사업에 호재가 되었다. 수출실적이 급증해서 1995년에 100만 불 수출탑, 1998년에는 기하급수적 수출 양을 달성해 1,000만 불 수출탑을 달성하고 철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공장도 수도권 김포공장으로 이전하게 된다. 더불어 회사 내에 디자인 연구소를 두고 소비자트렌드를 조사하고 개발한 결과, 1998년에는 세계적 금 홍보기구인 월드골드카운실에서 ‘Gold for Next Millennium Design’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귀금속 산업을 위한 각고의 노력
수도권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나서 이재호 이사장은 본격적으로 귀금속업계 전체 발전을 위한 관련협회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귀금속발전추진위원회 초대위원장, 한국 귀금속보석단체장협의회 회장, 한국 귀금속가공업협동조합연합회 회장 등이 그가 맡아온 직책이다. 단체의 수장직은 그의 행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그 첫 번째 성과는 주얼리산업 활성화를 위한 세제개선으로 고금매매시장 양성화를 위한 ‘의제매입제도’ 제안이다. 고금거래 시 3%의 부가세를 돌려받는 것으로 세법을 개정하도록 한 것이다. 개정을 위한 경비는 협회 자금부족으로 이 이사장의 사비가 충당됐다.
이재호 이사장은 업계를 위한 일이라면 직접 문제를 풀어갈 회사를 설립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국내시장은 1990년대 후반 이후 침체를 겪고 있는데 반해 해외 명품 브랜드 성장률은 급성장이었다. 이 회장은 국내브랜드 시장을 지켜내고자 론드 Lond’라는 프리미엄 브랜드를 론칭한다. 또 음성매매를 불식시키고 의제매입법의 실제화를 위해 직접 ‘골드스미스’라는 고금매입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제도의 정착을 위해 감행한 회사인데 다행히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유사한 업체도 등장하며 시장양성화도 활기를 띤다고 한다.
‘코리아메탈’이라는 금함량 분석회사는 고객 신뢰 회복을 위한 조처였다. 비싼 제련비 때문에 고금을 그대로 녹여 가공하는 것이 업계 관행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다량의 순금 함량미달을 초래했고 이것은 고객의 불신을 가져왔다. 이 이사장은 첨단기계를 도입, 직접 분석해 금손실을 최소화함으로써 시중 제련비의 20%선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제련업계의 반발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업계의 신뢰회복을 위해 업계에 많은 제안을 했지만 누구 하나 귀담아 들어주지 않아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설립한 ‘코리아주얼리감정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나라 귀금속제조사 400~500여 업체 중 감정시설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곳은 리골드가 유일했다고 한다. 코리아주얼리감정원은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KOLAS(한국인정기구) 국제공인기관으로 인정을 받았다. 업계를 위한 일념은 연쇄적으로 많은 필요를 불러왔고, 필요하다면 이재호 이사장은 자신의 재산에 손실이 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진취성을 보여 왔다.
그의 회사이지만 업계 신뢰회복과 발전을 위해 세운 회사들 중 몇몇은 해마다 적자가 발생하고 있지만 여전히 접지 않고 있다. 그의 재정적 여건이 허락하는 한, ‘업계 -다른 이들-을 위한 일’은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골드’는 우리날 최고의 체인업체로 우뚝 서있다.
다음 세대를 위한 후원사업
“제품회사들은 모두 후대로 물려주고 2009년부터 재단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가치관을 최고라 생각하고 다른 이들도 자기와 같은 노력 해주리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어려운 가정에 태어났지만 다행히 나는 물질적 성공을 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가진 것을 나누어줄 때입니다.”변함없이 끝까지 고객을 먼저 만족시키고 웃을 때 저도 따라 웃겠다. 는 각오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회사를 통해 업계 전반을 일정한 궤도에 올려놓은 이 이사장은 요즘 재단을 통한 후배양성에 열성이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후원기관하며 2011년, 2013년 한국 대표에게 대회출전 연습용 순금 2,000여 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선수들은 모두 금메달을 획득했다. 재단에 부설연구소를 설립하고 2010년도부터는 매년 업계를 대상으로 ‘한국주얼리 산업전략포럼’을 개최해 1년 동안 연구소에서 준비한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매년 ‘디자인포럼’, ‘디자인 세미나’등의 포럼을 행사를 통해서는 최신 디자인 트렌드를 제시하고 있다.
매년 2회씩 재단 연구소에서는 객원 연구원과 서포터즈를 선발하여 장학금이나 연구비를 지급하고 브랜드와 디자인에 대한 사례와 활용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자료집도 웬만한 국책 연구기관에 못지않는다. 분기별로 발행하는 ‘분기리포트’, 매년 발행되는 ‘년간리포트’, 서포터즈 결과물, 전략포럼 자료집, 디자인 포럼 및 세미나 자료집 등을 업계에 무상으로 배포하여 공익재단으로서의 소명을 다하고 있다.
“남을 위해 노력하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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