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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 2026-08-25 06:2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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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광일토건(주) 박노일 대표

가난으로 15세에 사업 시작해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

광일토건(주) 박노일 대표

광일토건(주) 박노일 대표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기업운영으로 알게 돼

가난으로 15세에 사업 시작해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



1등뿐만 아니라 노력한 사람도 상 주어 격려해주는 사회 돼야한다

인간의 의지로 세상에 태어날 때의 조건을 선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자신의 온전한 계획과 노력에 따라 변화되는 삶이어야 세상과 화합할 수 있는 즐거움과 희망으로 각자의 인생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정진해서 존경받는 삶을 완성해 낸 입지전적 인물들이 있다. 이들이 보통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받아들이는 개인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녹록지 않은 삶에 용기 있게 대처하라는 격려의 의미일 것이다. 광일토건(주) 박노일 대표의 입지전은 특히나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울림은 자신의 개인적 성공을 넘어 이웃에 대한 박애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다’란 상위 계층으로의 이동이 막힌 요즘 사회를 풍자하는 표현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거나 노력해도 애초의 궁핍에서 탈출할 수 없다면, 인생은 그저 생존일 뿐일 것이다. 좌절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박노일 대표의 삶의 이력은 한 조각 희망이 될 것이다.

15세에 사회생활 시작한 58세의 CEO

한 가지 이야기부터 전제하자. 가난 때문에 집집마다 생선을 팔러 다녀야 했던 15세 소년이 있었다. 집안의 생계를 도맡아 하면서 소년은 삶을 일찍 배우기 시작했고, 25세가 되면 본격적으로 진짜 사업가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현재 그는 50대 후반의 어엿한 그리고 크게 성공한 기업인이 되어있다. 자신의 인생 설계대로 잘 걸어온 것이다.

박노일 대표는 현재 종합건설회사인 광일토건(주)를 비롯해 광일환경(주), 광일S&S(주), 광일운수(주) 등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 회사들은 박노일 대표가 차곡차곡 쌓아온 인생의 발자국들이다.

물론 이 기업들은 모두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 박노일 대표는 그가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한 1982년 25세의 나이로 골재 납품업을 시작했다. 골재 납품은 경기 특수를 누린 88올림픽이 끝나자 이전 같은 활황은 어려웠다.

마침 1993년에 올림픽 경기장 건설을 위해 난지도가 폐쇄되면서‘건설폐기물 중간처리업’이 새로운 직업으로 부상했다. 덤프트럭을 이용해 운송하는 골재 납품과 맥락이 같은 분야였다. 박노일 대표는 과감히 사업방향을 전환했다. 그리고 회사가 점차 성장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종합건설과 운수회사 등을 소유한 중견기업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기업을 하고 있거나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만이 방법입니다. 한순간의 자만으로 방만해지면 금방 도태됩니다.”

많은 성공한 기업가들이 있다. 그들 기업의 현장과 실적들을 상세히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지만, 광일토건(주)의 박노일 대표에게서는 좀 더 다른 것을 기대하게 된다.


생선 행상으로 시작한 소년가장의 생활 전선

남원에서 태어난 박노일 대표의 집안은‘찢어지게’가난했다. 그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나이에 가족을 위해 생계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일이 생선 장수였다. 물론 좌판을 마련할 돈이 없었기 때문에 생선을 받아다가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는 행상을 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그것을 단지 불행으로 여기는 사람과 소중한 경험으로 교훈을 이끌어 내는 사람의 인생 경로는 달라질 것이다. 물론 박노일 대표는 후자 성향의 인물이다. 오늘의 박노일 대표를 만든 것은 ‘8할이 혼자 견디고 헤쳐 나가야 했던 생활이었다.’란 시의 유명한 한 구절로 전반기 그의 인생을 비유해 본다.

“아낙네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행상은 있었어도 그 또래의 아이가 생선 행상을 하는 경우는 없었지요. 돈을 떼인 적도 있었어요. 그때 저는 일이란 잘될 때도 있고 잘 안될 때도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이치를 깨달은 것은 정말 소중했습니다. 그 깨달음은 사업을 할 때 격언처럼 많은 도움이 되었지요.”

일종의 ‘작은 사업’을 하면서 박노일 대표는 ‘자신이 잘되기 위한 방법은 결국 자신이 상대하는 거래처에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나름의 판단을 했다.

가령, 그가 벽돌공장에 모래를 납품할 때 공장 사람들이 원가 계산을 잘 못해 상당한 손해를 보고 있었는데, 박노일 대표가 계산기를 가지고 다니며 공장의 입출금을 일일이 계산해 줬다고 한다. 자신과 거래를 하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를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영업방법이었다. 영리한 어린 사업가였던 당시의 박노일 대표는 이렇게 윈-윈하는 전략으로 서울 시내 벽돌공장에서 사용하는 모래의 80%를 납품했다고 한다.


사업은 나만의 이익 아닌 주변에 도움이 돼야

처음‘건설폐기물 중간처리업’을 시작할 때도 박노일 대표의 이런‘사람’을 중요시하고 주변에도‘도움’이 되는 사업가 정신은 여지없이 발휘됐다.

“지금 우리 공장이 있는 이곳은 본래 소를 많이 키우는 동네였습니다. 업종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사실 일반인들의 폐기물에 대한 인식이 좋지는 않지요. 그래서 6개월 동안 매일 동네에 와서 자진해서 소똥을 치우고 젖을 짠 후 뒤처리를 도맡아 했습니다. 우선 동네 분들과 마음을 터놓고 친해져야 제 사업에 대한 선입견을 해소하는 설득을 할 수 있으니까요.”

아침 10시에 동네로 출근해 주민들께 피로회복제도 나눠주면서 축사 일을 도왔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난 뒤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업을 해서 먹고 살려고 하는데 도와달라고. 주민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관청 허가가 나도록 나서서 도와주기도 했다.

현재 전국에는 약 550개의 폐기물중간처리업체가 있다고 한다. 공장 건축 시 지역주민들과 마찰이 있었던 곳이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사는 방법을 외면한 채 기관의 허가만 받으면 일 처리가 다 된 것이란 생각을 하는 업주가 있다면 성찰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21살 때부터 시작한 기부

한 개인의 인생관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에 따라 다른 이들과 구분될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 경험은 다르더라도 경험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올바름은 있을 것이다. 박노일 대표는 가난이 오히려 오늘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한다.

“밥을 굶어도 부모님을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오히려 감사했지요. 워낙 가난해서 오히려 제가 어떻게든 잘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거든요. 아마 어중간하게 어려웠으면 인생에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당시 가족을 부양하기에도 벅찼을 박노일 대표는 약관의 나이에 기부를 시작했다. 장학금이었는데 지금까지 쭉 이어오고 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첫 월급부터 아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초등학교 모교에 시계 12개를 사다주고 가난하지만 노력하는 아이들에게 격려의 표시로 나누어 달라고 교장 선생님께 부탁했어요. 그렇게 한 계기가 있었지요.”

박노일 대표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학급은 당시 일제고사에서 1등을 하면 상으로 시계를 줬다고 한다. 그런데 부친이 선생님이었던 한 친구가 매달 1등을 해서 시계를 가져가는 것이었다. 박노일 대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2등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때 그는 ‘가난하지만 열심히 생활하는 아이한테도 상을 주면 살아가는데 힘도 되고 사기가 더 오르지 않을까... 내가 나중에 돈을 벌면 그것부터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부모님의 팔순 잔치가 다가왔을 때 박노일 대표는 축의금을 받을지 말지 고민을 했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이라서 예상되는 액수도 많았다. 그는 가족회의를 해서 들어온 축의금을 전부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몇 천 만원에 이르는 축의금은 장애인 단체에 기부됐다.

회사 내에서도 ‘생활의 1%를 이웃에게’라는 모토로 자신은 수입의 1%, 직원들은 급여에서 0.1%를 떼어서 봉사활동 자금이나 직원 자녀의 장학 지원금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회의 귀감이 되는 일에 힘쓸 시기

가난했지만 야무졌던 15살 박노일 대표는 45살까지는 돈을 많이 벌어 은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그 나이가 되니 너무 젊었다. 그래서 새로운 가치관을 세웠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왔으니 나잇값, 호주머니에 돈 모으는 것보다는 사회에 귀감이 되는 행동을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주변 사람들, 우리 직원들, 그리고 제가 관여할 수 있는 세상을 챙기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어요.”

65세까지 열심히 물질적, 육체적 봉사를 하겠다는 박노일 대표는 중증 장애인들의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그들이 가족과 함께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도록 전동휠체어가 탑재된 차량을 무상으로 대여해 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광일토건(주)에는 10년~20년 근속한 직원들이 많다. 박노일 대표는 한 집안의 가장인 직원들의 생활을 끝까지 보장해 주는 것이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복지라고 생각한다. 즉 월급 제 날짜에 주고, 수익에 따라 보너스도 주고, 휴가도 적절하게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박노일 대표는 잘 나가던 폐기물처리업체가 일순간에 쓰러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돈이 모이니 비축하지 않고 개인의 향락에 남발해 결국은 회사가 망하는 사례들도 적지 않았다.

“내가 10,000원이 필요한데 11,000원의 행운은 올 수 있어도 100만 원어치의 뜬금없는 행운은 인생에 없습니다. 모든 일에 열심히, 성실하게 임하는 사람에게 응당한 보답이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시련도 내가 견뎌낼 수 있는 것보다 조금 어려운 시련이 있을 뿐, 너무 큰 시련은 주지 않습니다.”

광일토건(주) 박노일 대표는 45살에 자신의 인생을 일단락 해보는 자서전을 집필, 출판해 보관하고 있다. 자신과의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 후반기에 기록될 자서전도 분명 후배들에게 값진 귀감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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