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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 2026-08-25 03:5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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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남덕우 전 총리가 남긴 건 ‘기적

최장수 장관으로 우리나라 경제 꽃 피웠다

남덕우 전 총리가 남긴 건 ‘기적

남덕우 전 총리가 남긴 건 ‘기적’

최장수 장관으로 우리나라 경제 꽃 피웠다.

‘한강의 기적을 이끈 주역’, ‘경제계 1세대 원로’, ‘서강학파의 대부’ 등 다양한 수식어의 주인공인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5월 18일 향년 89세로 타계했다. 수년간 전립선암을 앓아온 남 전 총리는 노환이 겹쳐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사망하기 이틀 전 서울 강남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남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서강대 교수로서 정부와 정책의 각을 세우며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남 교수의 능력을 인정해 1969년 재무장관으로 전격 임명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은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마다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라!”고 농담처럼 건넨 말이 지금까지 회자가 되고 있다.

또 박 전 대통령은 남 교수에게 “정치는 내가 맡을 테니 당신은 경제 살리기에 전념해 달라”며 전폭적으로 신뢰를 보냈다. 그만큼 남 전 총리는 우리나라의 경제를 이야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남 전 총리의 열정과 경제 개발 달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3·4·5 공화국의 한국 산업화를 이끈 선봉장.

남덕우 전 총리는 1924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1945년 국민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 경제학 석사로 받고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남 전 총리는 4년 11개월의 최장수 재무부 장관이었으며, 4년 3월의 최장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그리고 1979년에는 대통령 경제담당 특별보좌관을 맡았으며 1980년부터 1982년까지 국무총리를 맡는 등 3·4·5 공화국 걸쳐 경제발전에 열정을 다 바치고 공직을 떠났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고 기획력과 추진력이 뛰어난 남 전 총리는 한국 경제의 ‘기적’을 불러일으킨 인물이었다. 남 전 총리는 경제 관료로 재임하면서 사채를 동결하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했으며, 증권시장 개혁과, 부가가치세 10% 도입, 사회간접자본 확충, 중동시장 진출 등 굵직한 경제 개혁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남 전 총리는 1973년 1차 오일쇼크 영향으로 물가가 치솟자 다음해 1월 ‘물가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등 긴축 대책을 내놨지만 수출업체들이 어려움을 호소하자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남 전 총리는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선 적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이끈 정부 경제팀의 헌신적 노력은 세계가 찬사를 보낸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남 전 총리는 외유내강의 리더십을 보였다. 모든 여건이 부족했던 시절 많은 사람을 만나 설득과 대화로 풀었고 꼭 해야 하는 일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또 그는 특정 지역이나 정치적 의도에도 치우치지 않고 일을 했다.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할 때 여러 장관들의 의견이 잘 맞지 않아도 절대로 언성을 높이지 않았고 차분하게 설득했다.

또한 항상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남 전 총리는 1980년대 정보기술(IT)의 진보를 예견하고 컴퓨터를 배웠으며 관료들 중에 누구 보다 워드프로세서를 능숙하게 활용하며 새로운 것을 익히려는 노력도 빠지지 않았다.

영원한 현역 남덕우

남 전 총리는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한국무역협회 회장,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 한일협력위원회 회장 등 끊임없는 활동으로 ‘영원한 현역’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그는 1983년부터 1991년까지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한국 무역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특히 서울 강남에 무역센터 건립과 코엑스는 남 전 총리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무역협회 건립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외국 바이어가 테헤란로에 방문하면 무역센터 빌딩에서 한국 업체를 만나고, 전시장에서 상품을 고르고, 현대백화점에서 선물을 사고,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잠을 자고, 공항터미널에서 출국 수속을 밟는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당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저는 남덕우 무역협회장님의 열정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회장님은 서울 강남구에 무역센터를 세워야 한다고 각계각층을 설득하셨던 일이 생생합니다. 1988년에 세워진 무역센터는 수출 강국 한국의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귀중한 상징물이 됐습니다”라며 “우리나라가 급성장한 교역의 밑바탕은 남 전 총리의 노력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남 전 총리의 업적인 한국무역센터와 코엑스 전시장 등은 무역입국의 초석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남 전 총리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2005년 한국선진화포럼을 설립하고 세미나 활동을 통해 한국 경제를 위한 고언(苦言)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경제 성장 과정에서 물가와 부동산 투기를 잡지 못하고 기업구조 개혁, 국민에 대한 경제교육 등의 과제를 완수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으며 경제 발전에 시동이 걸리면 정부 역할을 시장경제의 자율 기능으로 넘겨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시장경제주의자였다.

남 전 총리는 경제계의 원로로서 정치권과도 계속 인연을 이어왔다. 특히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유력 대권주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자문단 좌장을 맡아 ‘근혜노믹스’ 입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올 3월에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가진 국가원로 초청 오찬간담회에서 박 대통령 바로 옆자리에 앉아 두 사람의 끈끈한 인연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남 전 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 한 뒤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신 총리님이시고, 5000년 가난을 벗었다고 그러는데 그 남기신 발자취가 너무 크다고 생각한다”며 “또 한 번 제2의 한강의 기적을 곧 이루겠다고 마음먹고 최선을 다 하겠다”며 그를 애도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다양한 수식어가 많지만 그 중 ‘한강의 기적을 이끈 주역’이 제일 잘 어울린다. 그 중 한 단어만 뽑는다면 당연히 ‘기적’이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앞장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마침내 경제 부흥을 일으킨 ‘기적의 사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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