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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 2026-08-25 05:1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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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해남협의회 강동일 회장

움직일 수 있고 건강하면 어떤 일이든 나라에 기여하는 일 찾아서 해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해남협의회 강동일 회장

보통사람들에 사회봉사나 공적 기여는 항상 미루어놓은 과제 같은 것이다. 동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도움이 가치있게 쓰일 수 있는 곳에 봉사하고 싶은 마음은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영위해야 하는 생활에 휘둘려 쉽게 타인이나 공동체를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한다.

그런 일반인과 달리 봉사가 마치 하루의 규칙적인 일과인 것처럼 생활 속에서 필수적인 요소를 차지하는 건전한 사람들이 있다. 2013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해남협의회 강동일 회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국가를 향한 철저한 소명의식

김동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해남협의회장의 인상은 첫눈에 편안하고 다감했다. 여러 기관이나 단체에서 통솔 이력이 많으면 자칫 상대를 리드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의외의 느낌이었다. “책임감이 무겁습니다. 아직 소명이나 사명을 다 못했는데 이런 상을 받았습니다.” 김동일 회장은 마치 군인이나 공무원처럼 의무적으로 국가기관의 가치에 충성해야 하는 직업인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해남에서 백제당약업사를 경영하는 대표로 민간인이다. 다른 민간인과 다르다면 그에게는 국가를 향한 남다른 사명감이 있다는 것이다. 김동일 회장이 현재까지 살아온 삶의 상당부분이 여기에 할애되고 있다. 그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해남협의회장이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헌법기관으로 1980년대 초반에 범국민적 통일기구로 설립되었다.

국민의 통일의지와 역량을 결집해 한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하는 목적과 함께 최근에는 다변화하는 주변국의 정세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며 통일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 초당적·범국민적 차원에서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가는데 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기구이다. 의장은 현직 대통령으로 국내외에 대표성을 지닌 2만여 명의 지도급 인사들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임기는 2년으로 강동일 회장은 2009년부터 위촉됐으니, 3기째 연속 일하고 있는 셈이다. 강동일 회장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해남협의회장을 맡아서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국가 봉사이력은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남에만 있는 5·8 자유수호희

“1972년 5월 8일에 해남에서 5·8 승공회란 단체가 꾸려졌어요. 주민계도교육 차원에서도 경찰국이 나서 모범적이고 미래가 촉망되는 청년들에게 안보이념 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치안본부에 등록된 민간 안보 단체로서는 제1호였지요.” 강동일 회장은 한참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이었고 이 단체에 참여했다. 단체 설립에는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1968년에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김신조가 이끄는 북한공작원들이 남파돼 습격하려다 사살되거나 체포된 사건이 있었고,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도 있었다.

1969년에는 북한군이 미 해군정보기(EC―121)를 동해상에서 격추시켜 31명이나 되는 사망자를 낸 일도 있었다. 그리고 69년 미국 닉슨 대통령이 닉슨 독트린이란 이름으로 ‘아시아 국가들은 이제 미국에 군사 의존도를 줄이고 안보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라는 성명이 있었다. 남북한 대치상황에서 안보는 당면한 문제로 직면했던 것이다. “1983년부터는 국가 봉사이념에 관한 교육을 따로 받기도 했습니다. 간첩이 쳐들어오면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배웠지요.”

바다와 가까운 해남 지리의 특수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승공회에는 정신무장 교육을 다녀온 사람들만 가입하는 조건이 생겼다고 한다. 5·8 승공회는 기관에 의해 조직되기는 했지만 이후에는 많은 부분을 자율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자체적으로 성금을 모아서 설날이나 추석 등의 명절에는 해안경비대나 전경, 의경들에게 위문품을 전달했어요. 경찰의 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85년도에는 1976년 북한이 도발한 판문점도끼만행사건이 있던 현장을 견학했다고 한다. 강동일 회장은 이곳에서 국가는 국민이 스스로 지켜야 안전해 진다는 교훈을 새겼다고 한다. 이후 활동이 활발해진 강동일 회장은 1990년에 승공회 총무를 맡게 되었고 1996년부터는 자유수호회란 이름으로 개칭하고 회장을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회원이 1000여 명에 이르는 해남에만 있는 단체다.

강동일 회장의 열성을 알고 있던 해남 지자체에서는 사업계획서 양식을 주면서 500만 원을 지원해 줄테니 한도내에서 사업계획을 해보라고 제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동일 회장은 극구 반려했다고 한다. “목적이 다른 거지요.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십시일반해서 성금을 모아 일하는데 도리어 국가 돈을 축내면 안 되지 않습니까?” 이전의 편안한 인상과 다른 꼿꼿한 자세다.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국가안보 정신

강동일 회장의 꼿꼿함은 연원이 있었다. “저희 4대조 할아버지는 중추부사를 지낸 조선조 유학자였어요. 할아버지는 7대 장손인데도 불구하고 목숨이 위험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셨어요. 할아버지는 한학이 깊어 해남 주민 전체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강동일 회장의 아버지는 어떤 일에 연루되어 총살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할아버지가 목숨만은 살려주고 차라리 징용을 보내달라 애원해서 일본에 징용을 갔다왔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이 되고 조국에 돌아와 생계를 위해 건축 일을 하다가 떨어져 몸져 누웠다. 치료비로 재산이 모두 탕진됐다. 결국 강 회장이 열 살 때 작고 하셨다고 한다.

졸지에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 된 강동일 회장은 15살 때부터 한약방에서 심부름 일을 시작했다. 한 경찰이 강 회장의 딱한 처지를 보고 주선한 자리였다. 그후 강 회장은 한약방 심부름과 학교 심부름 일을 병행하며 고학했다. 그때 일을 주선해준 경찰에 대한 고마움이 강동일 회장으로 하여금 국가에 봉사하는 단체장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게 하는 계기로 한몫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들은 흔적을 남기면 곧바로 체포되는 운명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신분을 숨기거나 활동을 은밀히 했다.

당연히 서류상에 독립운동 전력을 증명할 만한 서류들이 없다. 그래서 명백히 조상이 독립운동가였는데도 불구하고 선친들의 기록이 없어 명예를 받지 못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많다고 한다. 강동일 회장의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주위에서는 항일운동 했던 분들은 넋을 기려야 하니 돈을 들여서라도 할아버지의 서류상 흔적을 찾아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강 회장의 대답은 의연하다.

“선친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한 행동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면 그것으로 후손은 만족하는 겁니다.. 굳이 국가의 명예를 얻으려고 서류 찾을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내가 할 일은 조상의 유지를 받들어 어떻게 이 나라를 통일 시킬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게 도움이 되는 겁니다.” 그는 연평도 포격사건이 있던 2010년에 자문회의 정기회의 때 발의를 해 전남에서 최초로 연평도에 200만 원의 성금과 김치 50박스 보냈다고 한다. 연평해전이 있던 3일후였다. “국가가 어렵고 국민이 고통 받는데 후방에 있는 국민이 나서줘야 하지 않습니까?”

월남 가족들 지원하고 정착도와

이처럼 강동일 회장의 대단함은 그의 행동적 실천성에 있다. 해남에는 북한에서 월남한 9명의 사람들이 2차 가족을 이루며 정착해 살고 있다. 주변의 증언에 의하면 강동일 회장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월남한 사람들은 연고가 없어 외롭습니다. 우리들이 접근해 주지 않으면 대인관계를 기피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끼리 부모 자식관계를 맺어주기도 하고 저도 그들과 한가족처럼 결연을 맺고 있습니다. 동명이인분이 있는데 형님으로 모시고 있어요.”

그는 정착을 위해 모두가 만류하는 보증까지 서고 있다. 마이너스 통장을 만드는데 보증을 서 잔고를 만들어 주고, 혹시 어디가서 쓰다가 모자라면 자신이 돈을 내어줄테니 전화하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는다고 한다. 아파트 지하창고를 임대해서는 헌 전자제품 등을 수집해서 모아놓고 필요한 사람이 가져다 쓸 수 있도록 개방해 놓기도 한다. 오히려 정보과에서 전화가 와서 월남자가 있는데 정착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문의까지 해온다고 한다.

수시로 불러다가 집에서 식사를 같이하는 일은 다반사다. 2년 전부터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공식적으로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김장행사를 갖고 김장을 담가주고 있다. “자유를 찾아왔는데 내 지역에서 안정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돌봐주어야지요. 해남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요즘은 군수님이나 군의원들께 앞으로 해남에 월남자 정착촌을 만들 수 있도록 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일화

통일역량강화를 목적으로 작년에 해남협의회원들은 백두산과 베트남을 견학하고 왔다고 한다. 강동일 회장이 얼마나 강직한 국가관을 지녔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일화가 회자된다. 베트남에서는 베트남전에 투입됐던 선배들의 싸움을 돌이켜 보고 고엽증을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을 문병했다. 성금과 라면, 학용품, 치솔, 비누 등의 위문품도 전달했다.

흔히 외유성 견학은 일정을 마치면 저녁에 삼삼오오 모여 사교성 파티를 즐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강동일 회장이 있는 한 해남협의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일주일 일정이었는데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면 꼭 그날 견학일정에 대한 수기를 쓰도록 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음주를 하고 유흥을 즐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전쟁은 비극이란 것을 알려주는 땅이 베트남입니다. 메콩강, 땅굴 다 가봤지요. 관광용은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습니다.”

‘땅끝마을’을 브랜드로 하는 민주평화통일 사업정책 구상

해남에는 한반도의 최남단인 땅끝마을이 있다. 강동일 회장은 전남에서 민주평화통일 사업 책정이 아직 없다면서 땅끝마을을 브랜드로 하는 통일 아이템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통일 염원탑을 크게 만들어서 땅끝에 와서 돌아보고, 통일염원을 담아 철야 횃불도 밝혀보고 해남에서 제작한 특별한 물인 통일염원수를 마시며 젊은이들이 통일에 대한 의식을 새로이하는 계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해남의 땅끝에서 통일 염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출범식때 청와대 영빈관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 앞에서 포부를 밝히는 것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만찬석상에서 대통령이 통일에 대한 의견을 구할 때 그가 한 대답은 이러했다. “해남의 땅끝마을은 한반도의 맨 남쪽이다. 땅끝에서 통일의 바람을 불러 일으켜 임진강, 신의주, 백두산으로 평통기를 가지고 올라가고 싶다고 했지요.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지역사회를 위한 다방면 활동

강동일 회장은 여러 가지 지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바르게 살기 협의회 수석 감사. 목포 덕인고 총동문회장 역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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