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센터나 기관에서 지위가 낮은 직원이나 민원인을 대상으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저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향후 성희롱 문제가 일어날 경우,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를 업무에서 즉시 배제하고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최대한 엄벌할 것이다.”
“성희롱은 뿌리 뽑아야 할 구태이다. 성희롱 문제에 대한 부산시 처벌이 가볍다는 말이 절대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이 말들은 모두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직접 한 말이거나, 혹은 부산시에서 공식적으로 배포한 보도자료에 들어 있는 문구이다. 많은 국민이 이번 사태를 보면서 ‘왜 말을 저렇게 하면서 실제 행동은 그렇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그 해답은 바로 ‘성인지 감수성’에 있다.
한순간에 모든 것 잃고 추락
제37대 부산시장이었던 전 오거돈 시장. 그는 2004년 재보궐선거를 시작으로 무려 4번의 도전 끝에 부산시장이 되었다. 그 전에 3번의 실패를 겪었다는 것은 곧 12년 동안 칼을 갈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굳이 오거돈 전 시장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든 그 정도 인고의 세월을 겪었다면 지금 현재 자신이 쟁취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런 일의 배경에는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이 존재하고 있다. 성적인 문제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망치거나 혹은 자신이 속한 단체를 망하게 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가장 최근에 차명진 전 통합당 후보는 ‘세월호 쓰리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쓰리썸은 3명의 남녀가 난잡한 성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공당의 후보인 그가 이러한 ‘쓰리썸’을 입에 올렸다는 것 자체가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했음을 드러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력한 대권후보였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 역시 직원과의 성관계가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성인지 감수성의 부족은 특정 정파, 특정 이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남자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있거나 중요한 자리에 앉은 사람일수록 이러한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날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하게 대두된 개념이 바로 ‘성인지 감수성’이다. 이 용어는 지난 2018년 4월, 법원에서 처음으로 사용됐다. 당시 한 교수는 자신이 한 여학생을 성희롱 한 사건으로 해임된 사실을 취소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원심에서는 교수가 학생을 백허그 했지만, 그 사실을 여학생이 주변에 알리지 않은 점, 해당 교수의 수업을 계속해서 듣고, 또 피해 신고를 했지만 피해 사실을 진술하기를 거부했다는 점을 들어 ‘과연 이것이 성희롱 피해자의 대응인가’에 의구심을 표했고 결국 ‘교수는 성희롱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는 상대가 교수인 만큼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고 2차 가해를 당할 염려 때문에 피해 사실에 대한 신고를 두려워했다는 전후 맥락을 파악해 교수가 성희롱을 했다고 판단했다. 바로 이러한 대법원의 논리가 바로 ‘성인지 감수성’이다. 즉, 피해자의 심정에서, 피해자의 위치에서 사건의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정의를 해보자면 ‘성별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 상황을 인식하고 성차별 요소를 인지하는 민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과거와 다르게 이러한 성인지 감수성이 건강한 사회생활, 인생의 경쟁력을 위한 조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이런 문제가 생기면 학교, 직장, 혹은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오래된 남성의 문화가 문제
중요한 점은 적지 않은 남성들이 이러한 민감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 70~80년에는 커피숍에서 서빙을 하는 여성들의 엉덩이를 스윽 만지는 것은 흔한 일상의 풍경이었다. 물론 여자가 이를 반기지는 않았겠지만, 남자 손님을 모셔야 하는 직업의 특성상 당시에는 이런 일이 소송으로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는 다방 여자에게는 으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성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이는 ‘참을 수 없는 일상의 고통’이기도 했다. 매일 매일 남자의 손길이 자신의 엉덩이로 향한다는 점, 그러면서도 음란한 말과 느글느글한 눈빛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침기 힘든 일이었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문화에서 유지되고 문화가 전수된 사회에서 자라온 남성의 입장에서는 여자를 하나의 성적 도구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길러졌고 심지어 ‘여자는 꽃’이라는 말도 서슴없이 받아들이곤 한다. 특히 한국 특유의 유흥문화는 이를 더 강화했다. 과거부터 술을 따르는 ‘기생’이라는 여성이 있었고, 이는 고스란히 현대의 룸살롱에서 ‘아가씨’로 이어졌다. 심지어 노래방에만 가도 얼마든지 아가씨를 부를 수 있고, 심지어 나이대도 선택할 수가 있다. 이는 여성이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는 의미이고, 이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진 존재가 아닌,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성’이라는 인식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권력자들, 고위 공직자들에게 이러한 인식이 있으면, 그것이 고스란히 자신의 부하 여성에게로 투영이 된다. 회식 자리에서 부하 여직원에게 둘러싸인 오거돈 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부하 여직원은 그저 ‘꽃’의 존재였고,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성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일상에서 이런 성인지 감수성이 무시되는 사례는 무수하게 많다. 아주 사소하게는 “오늘 참 예쁘다. 저녁에 누굴 만나냐?”, “안색이 피는 것을 보니 남자가 있나 보네?”라는 말도 사실 은근히 여성에 대한 평가, 그리고 성적인 부분을 지적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성인지 감수성은 남녀를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최소한의 건강한 시선이 아닐 수 없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 역시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 그들이 결코 성적으로 쉽거나, 남성의 성적 어필을 쉽게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할 때 여성의 입장에서 이것이 모욕적이거나 불쾌감을 유발하지는 않는지를 반드시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여전히 성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고 단속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가깝게는 이발소, 마사지, 노래방에만 가도 언제든 성을 파는 여성들이 있고 실제 성을 무기로 남성에게 돈을 뜯어내는 여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은 남성이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물적인 토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러한 물적 토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문제는 남성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이다. 다른 모든 것은 차지하고서라도, 경쟁력 있는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성인지 감수성은 반드시 지켜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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