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타필드테일러 이동만 대표, 나누면서 사는 삶’의 기쁨을 체득
대한민국 패션1번지는 서울의 강남이다. 세계 유명 브랜드가 강남으로 집중되고 한국의 최고 부호들도 강남에 거주한다. 희소성에 가치를 두고 세계적으로 단 하나뿐인 제품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곳에서 아직껏 핸드메이드를 주장하며 40년 전통을 잇는 맞춤양복점이 있다. 바로 논현동에 위치한 체스타필드테일러(대표 이동만)가 그곳이다.
1970년 산업화의 물결로 이 땅에 도래한 ‘기성복’이 주류를 이루기까지 장인의 손에서 한 땀 한 땀 제작된 ‘맞춤복’은 그 시대 최고 부유함의 상징이었다. 현재도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각종 레저복과 아웃도어를 생산하며 ‘브랜드 정장시대’가 활짝 열어있지만,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의상을 고집하는 패션리더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강조하며 이곳 체스타필드테일러의 문을 노크한다.
이동만 대표 역시 우리나라 양복사에 한 획을 그으며 기술과 품질 특수 소재로 맞춤양복의 명품화를 선언해 패션1번지의 코드를 맞추고 있다. 맞춤양복의 특성을 알고 즐겨 입는 사람들에게 장인 정신이 깃든 핸드메이드 명품을 제공한다는 것은 또 다른 가치를 부여한다. 전 세계적으로 단 하나뿐인 의상을 착용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유명 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값진 결과라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시선을 주목케 한다.
이미 체스타필드테일러의 이동만 대표는 ‘전국소기업소상공인대회’에서 ‘지식경제부 장관’상을 수상하며 ‘양복명인’의 반열에 올라서 있다. 그러므로 과거 ‘쟁이’로 불리던 직업적 소명의식이 현재는 ‘장인’으로 격상돼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덕분에 강남에서는 최고의 양복맞춤 전문점으로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그는 현재 (사)한국맞춤양복협회 부회장으로 재임하며 세계대회에 각종 작품들을 출품해 한국의 맞춤양복 우수성을 알리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넓히는 데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귀족 취향의 ‘맞춤복’, 현대에 패셔니스타의 ‘맞춤복’으로 진화
19세기 말, 근대화의 문을 연 갑오개혁이 시작되면서 제일 먼저 한국인의 의식주(衣食住) 중 외향에 속한 두발과 복색에 변화가 나타났다. 고종황비인 엄비가 양장에 모자와 양산을 걸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한 데서부터 시작해 외국에 유학 갔다 온 신여성과 선교사, 외교관 부인과 고급관리 부인 등이 한복을 벗고 맞춤형 양장을 착용했다.
이와 더불어 상류층 남성들도 구군복을 폐지하고 서양식 육군복장을 착용했으며 황제의 칙령에 따라 영국의 대례복을 모방해 만든 서양식 문관복으로 통일했다. 일반 남성들은 유학생과 외교관을 중심으로 프록코트나 색코트를 한복을 대신해 착용했다. 특히 색코트(sack coat)는 깃이 턱 밑으로 바싹 다가가 있고, 앞섶이 가슴에서 무릎까지 벌어졌으며, 와이셔츠의 칼라는 둥근 크라이앵 셔츠고, 넥타이는 보타이처럼 생긴 크라바트였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던 맞춤양복이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던 1970년에 들어서자 사양산업의 길로 들어선다. 화학섬유산업의 발달은 패션계뿐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달라졌으며 일반생활상도 현저히 높아져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 귀족층으로 대변되는 중산층은 여전히 ‘맞춤복’을 선호하였으나 고가의 제품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서민층에서는 ‘기성복’을 골라 입기 시작했다.
또한 라이프스타일이 강조되면서 그에 맞는 캐주얼 스타일의 각종 레저복과 아웃도어들이 생산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브랜드 정장시대’는 대량화, 대중화, 규격화라는 장점을 낳았지만, 반면 대기업의 횡포로 대두되는 가격 경쟁을 양산했다. 그러나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맞춤복 전문 업체에서는 한결 같은 마음과 서비스로 명맥을 유지하며 차별화된 맞춤복의 장점인 개인화, 개성화, 유일화를 내보였다.
세상에 단 한 벌밖에 없는 제품으로 개개인의 품격과 개성을 드러내는 맞춤복을 통해 명품을 추구하는 패tus니스타의 기호를 사로잡은 것이다. 아울러 세계화, 국제화란 추세를 감안해 양복기술을 가진 전문가들이 각종 기능올림픽을 치루며 ‘쟁이’에서 ‘장인’으로 신분을 격상시켜갔다. 그럼으로 현재 한국의 양복기술은 세계기능올림픽에서 12연패를 차지할 만큼 눈부신 쾌거를 이룩하고 있다. 더욱 최근에는 동반성장위원회로부터 ‘중소기업적합업종’에 선정되어 맞춤양복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체스타필드테일러의 이동만 대표는 “맞춤복의 최고 가치는 고급스럽고 예술적인 스타일의 완성에 있다. 또한 착용하기 편리하도록 개인의 신체 부위에 꼭 맞게 제작된 디테일에도 그 가치가 묻어 있다. 꼼꼼한 장인의 손길이 가닿지 않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안목과 감각은 대기업에서조차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개인의 장점은 최대로 살려주며 단점을 보안하는 기술을 통해 맞춤복의 명품 가치를 더욱 증명한다”고 들려준다.
‘양복의 명품화’ 추구하는 이동만 대표의 장인정신
체스타필드테일러의 이동만 대표가 맞춤양복을 제작하는 ‘양복장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40년 전의 일이다.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형님이 운영하던 양복점에서 자재를 나르는 심부름을 하다가 그의 나이 17세 되던 해에 자신의 진로를 확정하고 본격적으로 양복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형님이 운영하던 양복점에서 기초적인 재단과 원단을 다루는 방법 등을 터득하다가 나이 20세가 되자 더 큰 기술을 배우고자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당시 서울 명동에는 유명한 양복점이 즐비했고 찾는 사람도 많았다.
그중 수제양복의 명문으로 소문난 ‘체스타필드’에 입사해 8년간 실무경력을 쌓고 성실하게 이행하면서 체스타필드의 전통기술을 전수받는 수제자가 된다. 점차 그의 탁월한 재단 기술을 인정받으면서 남들이 갖지 못한 우수한 기술을 습득하는데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 결과 이동만 대표는 18년 동안 갈고 닦은 솜씨로 1989년 강남구 논현동에 국내 최고의 맞춤양복점인 ‘체스타필드테일러’를 오픈하게 된다. 그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그는 10년 후인 1998년 8월 한국남성복기술경진대회에 처음 출전하여 노동부 장관 대상을 수상하며 기량을 만천하에 알리게 된다. 당시 “맞춤정장 체스타필드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으로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고 들려주며 도제식으로 기술을 전수한 은사에 대한 예를 잊지 않았다. 이어 그는 “성경말씀에 나오는 ‘게으른 종’이 되지 않도록 자신이 가진 달란트를 모든 사람들에게로 더욱 넓혀 베풀겠다는 희망으로 시작되었다”고 귀띔한다.
최근에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주문양복연맹총회’에서 개최한 기술경진대회에 출품해 세계 50여 출품작 중 최고의 기술과 디자인을 인정받아 대상(금메달)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핫한 핑크 색상의 캐주얼한 슈트 디자인으로 소매와 바지의 스트링 처리된 줄을 당기면 갑자기 탈착이 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적용했다. 특히 섬세하고 부드러운 실루엣과 화려한 색상, 안정적인 패턴에 아이디어를 더해 무대 위에서도 볼거리를 제공해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이보다 앞선 지난해 11월에도 소상공인의 날 지경부장관표창을 받은 바 있다.
이동만 대표는 “과거에는 양복업이 인기 직종이었다. 경제적인 소득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양 산업에 속한다. 40여 년간 맞춤양복업계에 종사해 오면서 아쉬움도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맞춤복은 건축물의 구조와 같아 균형과 미적인 디자인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예술이나 진배없다”고 소신을 들려준다.
‘나누면서 사는 삶’의 기쁨을 체득하고 있는 이동만 대표
체스타필드테일러의 이동만 대표는 기독실업인모임(CBMC)과 삼성 라이온스클럽, 장원로타리클럽 등 다양한 모임을 통해 소외된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더욱 올해는 장원로터리클럽과 서대문경찰서, 그리고 서울아버지합창단의 주최로 연세대 강당에서 ‘북한이탈주민돕기 자선음악회’인 ‘가을밤! 사랑이 머무네’를 개최해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북한이탈주민들의 경제적 자립과 안정적 직업 취득, 청소년 장학사업의 밑거름이 되고 동포애적 사랑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마련된 음악회다. 본 공연으로 서울아버지합창단의 우정의 노래, 사랑이여, 메모리의 합창무대에 이어 테너 박현재, 소프라노 박정원, 바리톤 고성진 씨가 주옥같은 음악을 들려줘 감상을 배가 시켰다. 또한 잉카 엠파이어의 라틴팝 그룹은 전통음악을 현란한 연주솜씨와 함께 들려줘 환호성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눈길과 관심을 한 몸에 받은 평양민속예술단은 이미 한국사회에 잘 알려진 ‘반갑습니다’와 민속무용 돈들라리 공연으로 큰 박수를 받았다. 이날 본 공연에 앞서 장학생을 선발해 기금을 전달하기도 했으며 2시간의 공연으로 예술을 통해 관람석이 하나가 되는 ‘소통’의 장으로 마감됐다.
행사를 주최한 이동만 대표는 “어렵게 북한을 이탈해 대한민국에 정착하려는 사람들이 더욱더 아름다운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고자 음악회를 준비했다”며 “음악은 누구에게나 희망이 되는 만큼 마음껏 감상과 사랑을 나누었으면 한다”고 마음을 전한다. 현재 그는 자수성가한 사람의 표본으로 지역 사회는 물론 불우한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어 귀감이 된다.
무엇보다 5대째 기독교를 숭상해온 집안의 내력에 의해 오래 전부터 선행을 실천하며 살아온 그에게, 올해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 1년생 늦둥이 아들 이명찬 씨가 그의 직업과 기술력을 존중해 가업(家業)을 잇겠다고 선언을 하면서 행복감이 더욱 충만해졌다. 이러한 ‘2세 경영’을 통해 진정한 ‘대한민국의 장인 집안의 전통’을 100년 사업으로 이어가며 명실상부 최고의 명품 양복을 제공하는 ‘체스타필드테일러’가 되겠다는 각오를 내보인다.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지어준 양복으로 멋을 냈지만 향후 아버지의 양복을 책임지겠다는 다부진 포부를 밝힌 잘생긴 명찬씨의 2세경영이 기대가 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