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베트남학회장 취임 조선대 안경환 교수
베트남 최초의 외국인 언어학 박사 1호, 베트남 정부로부터 훈장도
“주요 상대국으로 부상한 양국 간의 이해를 진작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포스트브릭스(Post-Brics)로 부상하고 있는 베트남은 우리에게 매력적인 상대국이다. 국제관계에서는 주요 무역상대국이자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동남아 한류의 진원지이며, 다문화가정의 상당 부분을 베트남 이주여성이 차지한다. 하지만 1975년 4월 30일 공산화 통일로 인해 외교와 민간교류가 오랫동안 단절돼 있던 탓으로 외교관계가 정상화된 지 22년이 되어도 베트남에 대한 일반의 이해는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베트남학회는 15년째 진지한 학문적, 현실적 이해관계를 연구해오고 있다. 지난 8월 초에는 새로운 학회장으로 조선대 안경환 교수가 취임했다.
전공 살릴 길 없어진 베트남 공산화 통일
미국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에서 북부베트남(월맹)이 승리한 후 베트남은 1975년 공산화됐다. 우리나라는 즉각 외교를 단절했다. 그해부터 베트남어를 전공한 학생들에게는 전공을 살릴 진로가 막혔다. 조선대학교 영어과 안경환 교수도 그중 한 학생이었다. 물론 대학에서 전공을 했다고 모두 직업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베트남어 같은 희소 학문은 전공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았을 것이다.
“제가 74학번이니까 베트남어를 열심히 공부하던 대학 2학년 때였지요. 졸업을 하고 결국 전공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그룹 공채로 입사해 현대중공업(주)에 배치되어 선박영업을 담당했지요.”
안경환 교수는 1989년 7월에 방콕 주재원으로 파견되면서 다시 베트남어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학교를 졸업하고 12년 동안 베트남 사람을 만난 적도, 베트남어를 활용할 기회도 없었다. 방콕에 근거지를 두고 비공식적인 루트로 무역을 담당하던 현대종합상사의 호찌민시 사무소에 파견되었다. 외교관계가 없어 공식적으로 지점을 개설할 수 없어 3개월 마다 한 번씩 방콕과 호찌민시를 왕래했다.
“당시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의 현대차를 몰랐습니다. 현대 포니가 1976년도에 생산됐으니 그럴 수밖에요. 현대차를 타고 다니니까 일본차냐고 묻더라구요.”
도이모이(베트남의 개방화정책) 이후 최초의 외국인 언어학 박사 1호
베트남은 1986년부터 ‘도이모이’란 이름으로 개혁·개방화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국과는 1992년에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비공식적인 접촉으로 베트남과 연을 이어오던 안경환 교수는 다른 기회를 모색했다.
“베트남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회사의 베트남 진출을 위해 일을 좀 더 잘하려면 언어를 다시 공부해야겠다 싶어 당시 호찌민종합대학교(현 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를 찾아갔어요. 그동안 사용하지 않아 모두 잊어버렸나 싶었는데 몇 개월 공부하니 다시 말문이 트이더군요. 그래서 내가 지금 공부하는 과정이 어느 수준이냐 물어봤더니 대학 1학년 과정이랍니다. 제가 그래도 명색이 한국에서 4년제 정규과정에서 전공을 했는데 다시 학부과정을 공부할 이유가 없어 대학원과정에서 공부하겠다고 했더니 베트남에 아예 대학원 제도가 없다는 겁니다. 공산화되면서 대학원과정을 없애버린 겁니다. 영어도 배우지 못하게 했어요.”
안경환 교수는 어이가 없어 여러 방면으로 자신의 의견을 알렸다. 호찌민텔레비전방송국(HTV), 베트남텔레비전방송국(VTV), 인민일보 등 각종 언론매체, 교육훈련부 장관 앞으로 수시로 편지를 보냈다. ‘개방화정책을 도입하면서 대학원조차 없으면 어떻게 개방화 정책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이러면 도이모이 정책은 실패한다. 하루 빨리 대학원을 개설해서 외국인 학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마치 안경환 교수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처럼 놀랍게도 7,8개월 후에 호찌민대학으로부터 ‘대학원을 개설했으니 등록하라’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안 교수가 호찌민대학교 대학원 언어학과 최초의 외국인 대학원생이었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심지어 한국 대학원의 편제와 커리큘럼 방식 등을 조사해 호찌민대학원이 체계를 잡는데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대학원 운영의 기본 틀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대학원생이었던 관계로 안 교수는 주중에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수업시간의 특혜(?)를 보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에서 외국인 최초의 언어학 박사 1호가 됐다. 호찌민대학은 현재 베트남에서 일류대학으로 꼽힌다.
국내 베트남 관련학과 개설되면서 교수로 전직
베트남을 더 잘 알면 회사에 기여할 수 있겠다 싶어 마친 공부는 또 다른 방향에서 안경환 교수의 전환점이 되었다. 양국에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무역을 비롯한 다방면에서 베트남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국내 대학에서 베트남 관련 학과들이 개설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랜동안 외교관계의 단절로 베트남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정보를 가진 사람이 태부족이었던 것이다. 대학에서 교수를 모집하는데 지원을 하는 사람이 없어 대학당국에서 당황할 정도인 형편이었다.
"부산의 영산대학교에서 수소문해서 교수로 와 줄 수 없겠느냐고 연락이 왔더군요. 한국으로 전화를 걸어 친구와 지인들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결국 회사는 내가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잘할 수 있겠지만, 베트남에서의 산경험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너 밖에 할 수 없고 더 보람있는 일이라는 의견들에 저도 깊게 공감했지요.”
결국 안경환 교수는 1989년도에 방콕을 경유해 베트남과 접촉을 시작한 후 5년 만인 1994년도에 베트남을 가르치기 위해 교수로 한국에 돌아왔다.
양국간 교류에 역할 할 수 있는 베트남 학회
한국에 베트남학회가 있듯이 베트남에는 ‘한국학회’가 있다고 한다. 체계적이고 학문적 활동이 왕성하다고 한다. 베트남이 한국의 주요 무역상대국으로 부상하고, 국내 기업이 대거 진출하면서 한국을 공부하려는 베트남 젊은이들에 대한 학비 지원 등 장학혜택도 주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1967년도에 처음 베트남학과가 개설되었는데, 당시는 군사적 목적으로 세워져서 학문적 체계가 빈약하고 학문적 연구 성과에 비해 비정상적인 연륜만 쌓인 결과를 낳았어요. 더구나 17년 8개월간의 외교관계 단절은 학문적 교류의 단절로 이어져야 했지요. 지금부터라도 더 착실히 체계와 비전을 세워나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1999년에 설립된 베트남학회에는 현재 50명 가량의 회원이 있다. 지금까지는 학회활동이 활발했다고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안경환 교수는 ‘전국 대학에 베트남관련 학과도 많지 않은데다가 학회활동에 재정적인 뒷받침 해 줄 기업가들의 관심이 아쉽다’라고 한다. 양국 간의 미래를 내다보고 학회 지원을 자처하는 기업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학회장으로서 우선 베트남 연관 기업들의 CEO들을 회원으로 영입해 활동 반경을 넓히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안경환 교수가 베트남어를 전공하고 나서 가장 보람있는 일로 꼽는 것은 무엇보다 베트남에 최초의 한국어학당인 조선대학교 부설 ‘호찌민세종학당'을 세웠다는 것이다. 2008년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교 내에 한 과정이 16주 커리큘럼으로 개설됐는데, 현재 약 500명이 공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한국어학당이라고 한다. 지금은 세종학당재단으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탄탄하게 발전하여 다른 지역 세종학당의 벤치마킹이 되기도 하였단다.
“베트남은 최고의 한류 열풍지입니다. 한국진출을 원하는 유학생들도 많고요, 또 다문화 가정의 이주여성이 5만 5천여 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지요. 말하자면 베트남은 사돈의 나라입니다. 국가적으로 더욱 유심해야 할 것은 베트남은 5위권 안의 주요 교역대상국이라는 거지요. 한국베트남학회는 양국 간의 교류 증진을 위해 서로 간의 이해를 진작시키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트남에 한국인들이 많이 진출하면서 베트남경찰들이 한국어를 공부해 자국 내 한국인들과 의 업무를 한국어로 일처리를 하는 경우도 생긴다고 한다.
“현재는 전 세계 54개국에 130개의 세종학당이 있는데, 세종학당재단에서는 계속 확대해서 한국어보급의 중심역할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정도로 한국어의 세계화는 한류의 확산과 함께 대한민국의 브랜드가치, 국격을 높이는 중요한 사업입니다.”
호찌민대학교에 세종학당을 어렵지 않게 개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학원당시 지도했던 교수들이 연륜이 쌓여 보직을 맡게 되고 총장이 되면서 힘을 발휘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경환 교수는 각자의 학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상생을 위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된 것에 감회가 새로웠다고 한다.
베트남의 위대한 인물 자서전·고전 번역 훈장 받아
안경환 교수에게는 베트남 정부로부터 수여한 두 개의 훈장이 있다. 평화우호훈장과 문화진흥공로훈장이 그것이다. 양국 간 외교와 문화전파에 크게 기여했다는 치하다. 안경환 교수는 4 권의 베트남 서적을 번역 출간했다. 하나는 베트남의 국부(國父)인 호찌민의 ‘옥중일기’다. 또 베트남 독립과 통일전쟁 영웅 보응우엔잡 장군의 회고록 ‘잊을 수 없는 나날들’ 의 자서전도 번역 출간했다. 당투이쩜 열사의 전쟁일기 ‘지난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는 베트남판 안네의 일기라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하노이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자원하여 남부베트남의 적진 깊숙이 투입되었던 당투이쩜은 미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작전에 참여했던 한 미군이 그녀의 의료가방에 있던 노트를 태우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가 귀국 시 미국으로 가져갔는데, 이것이 바로 그녀의 일기였다. 만약 이 일기의 주인공 유가족이 이 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보고 싶을까를 생각하던 미군은 유가족을 찾아 일기를 돌려주기로 하였다. 미군은 사본을 떠서 35년 만에 베트남에 생존해 있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일기를 보낸 것이다. 일기 주인공의 여동생들이 이것을 책으로 편집해 2005년도에 출간했는데, 평소 5,000부 정도가 팔리면 성공이라던 출판시장에서 그해 40만부가 팔려나가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한다.
‘쭈우옌끼에우(Truyen Kieu)’도 그가 심혈을 기울인 역서 중 하나다. ‘쭈우옌끼에우’의 저자 응우옌주는 베트남에서 영국의 셰익스피어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2015년은 ‘쭈우옌끼에우’의 저자 응우옌주 탄신 25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베트남 정부에서는 이를 기념해 국가행사로 ‘응우옌주 탄신 250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할 계획인데, 프레 컨퍼런스의 성격으로 한국에서 올해 먼저 한국베트남학회가 주도적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해 줄 수 없겠느냐는 요청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오는 10월 24일 한국베트남학회가 주도를 해서 양국 간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양국 간 다방면의 교류에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탈북자들을 위해서도 긴요한 일을 베트남학회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탈북자들이 라오스나 베트남 통해 국내로 입국하는 루트를 밟는데, 거기서 잡히면 강제로 북송돼 총살을 당하는 건 뻔하지요. 저희 베트남학회가 후방에서 양국간 민간차원의 친선관계를 넓혀가면서 이들 나라에 인도적인 호소로 이런 어려운 상황을 조정할 수 있는 역량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야나 영역의 초창기에는 주류가 형성하기 전에 먼저 가치를 행동으로 구현해가는 선구자가 있기 마련이다. 안경환 교수가 그런 인물임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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