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27일 단행한 정기 사장단 인사는 한마디로 변화와 파격보다는 안정과 재기에 방점이 찍혀있다고 할 수 있다.
당초 이번 인사를 앞두고 재계에선 창사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한 삼성전자가 파격적인 인적 쇄신을 통해 국면전환을 모색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예측은 철저히 빗나갔다.
삼성의 이번 인사는 규모도 소폭이었지만, 내용면에서 특별한 변화가 없다. 오히려 위기의 진원지인 반도체 부문의 전영형 부회장(DS사업부문장)을 대표이사로 발탁하며 힘을 실어줬다.
◆힘실린 전영현체제...HBM전세만회 위한 특단의 조치
삼성전자가 27일 사장 2명, 위촉업무 변경 7명 등 모두 9명 규모의 정기 사장단 인사를 발표했다. 핵심은 역시 전영현 부회장을 대표이사로 내정, 기존 한종희 부회장과 투톱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삼성의 핵심 사업인 반도체 부문이 올들어 AI메모리를 중심으로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밀리고, 파운드리와 시스템IC 역시 존재감을 잃은 상황에서 대 수술이 예고됐지만, 삼성은 안정을 택했다.
삼성은 지난 5월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에 구원투수로 등판한 전영현 부회장에게 주력인 메모리사업까지 맡기며 '전영현 체제'를 보다 공고히 했다.
이는 전 부회장이 위기의 반도체 사업 재도약을 위해 발탁된 지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데다, HBM(고대역폭메모리)조직 신설 등 전영현체제 하에서 시도된 경쟁력 재건프로젝트에 대해서 실질적인 인사권자인 이재용회장이 다시한번 믿고 맡긴 것으로 읽힌다.
메모리 사업 1위 지위를 회복하고 경쟁력 강화에 더욱 힘쓰라는 이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인사라는 의미다. 이 회장은 최근 하이닉스에 빼앗긴 메모리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이 회장으로선 반도체 재도약에 사활을 건만큼 전 부회장을 아예 대표이사로 승격,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삼성 위기론을 돌파할 카드로 '메모리 초격차'를 꺼내든 전 부회장에게 보다 힘이 실릴 것으로 관측된다.
업계에선 전 부회장이 지난 7월 DS부문장에 발탁된 이후 한 달여 만에 HBM 전담개발팀을 신설하는 등 시장 우려가 크고 경쟁력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HBM에 역량을 집중해왔다는 점에서, HBM전세만회를 위한 특단의 조치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전략통'인 김용관 사장이 DS부문 산하에 신설된 경영전략담당 수장에 앉은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엔비디아에 대한 12단 5세대 HBM(HBM3E) 퀄테스트 통과에 사활을 걸고 있는 삼성으로선 전영현 체제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어떻게든 재도약의 전환점을 만들겠다는 전략이 내포됐다는 뜻이다.
게다가 전 부회장은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강점을 지닌 인물이다. 엔비디아와의 5, 6세대 HBM 납품과 파운드리 라이벌인 대만 TSMC와의 '전략적 동거' 등 전 부회장의 풀어야할 과제가 산적해있다.
전 부회장은 여기에 경계현 사장이 맡았던 SAIT(옛 삼성종합기술원) 원장도 겸임한다.반도체 사업 진출 50주년을 앞두고 전 부회장이 메모리 전반의 기획, 개발, 사업, 마케팅을 아우르는 삼성 반도체 부활의 막중한 책임을 맡은 셈이다.
◆'글로벌 인맥' 한진만, 파운드리 부문장 전격 기용
DS부문 인사에서 또한가지 주목받는 것은 파운드리 사업부문장의 교체다. 삼성은 이번 인사에서 파운드리 부문장에 미국서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을 이끌어온 한진만 DS부문 미주총괄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 발탁했다.
당초 파운드리 부문장은 교체가 유력시됐된 일이다. 삼성 파운드리는 올들어 수주 부진과 낮은 가동률에 적자가 쌓이고 있다.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 선두 TSMC와의 격차가 더 벌어지며 삼성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야말로 '아픈 손가락'이다.
한 사장의 파운드리 부문장 기용은 적절한 판단으로 보인다. 한 사장이 미국에서 쌓아온 글로벌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 파운드리 대형 고객을 확보해 달라는 주문이다.
메모리와 달리 파운드리는 수주형 반도체사업으로 대형 바이어 확보가 사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삼성 파운드리가 벌써 2년전에 세계 최초로 3나노 공정 양산에 돌입했음에도 TSMC와 격차를 줄이기는 커녕 더 벌어진 것도 엔비디아 등 대형 바이어 확보에 실패한 탓이다.
업계에선 최근 이재용 회장이 파운드리와 시스템LSI(설계) 사업의 분사에 관심 없다고 밝힌 것도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미련과 '할 수 있다'란 자신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빅테크 리더 인맥이 두터운 한 사장을 기용함으로써 파운드리 사업에 다시한번 승부수를 띄운 것이란 얘기다. 여기에 파운드리사업부에 사장급 최고기술책임자(CTO) 보직을 신설, 다시한번 힘을 실었다.
글로벌제조&인프라총괄 제조&기술담당에서 파운드리 CTO로 자리를 옮긴 남석우 사장은 반도체 연구소에서 메모리 전제품 공정 개발을 주도한 반도체 공정개발 및 제조 전문가다. 파운드리 사업의 핵심은 선단 공정의 수율 개선에 올인하겠다는 이재용 회장의 의지가 엿보인다.
삼성 측은 이와관련, "남 사장이 반도체 공정 전문성과 풍부한 제조 경험 등 다년간 축적한 기술 리더십을 바탕으로 파운드리 기술력 제고를 이끌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처럼 반도체 핵심 부문에 대해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친 반면에 나머지 사업부 인사에서는 별다른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한 점도 역력하다. 특별한 승진도 없고 교체도 없다.
한종희 디바이스경험(DX) 부문장(부회장)과 이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정현호 사업지원TF장(부회장)은 예상대로 모두 유임됐다. 한 부회장은 기존에 겸임하던 생활가전(DA)사업부장 뿐 아니라 이번에 신설된 품질혁신위원회 수장도 겸하게 됐다.
노태문 모바일경험(MX)사업부장(사장)을 비롯해 김우준 네트워크사업부장 등도 모두 유임됐다. 지난해 말 퇴임했던 구글 출신 이원진 사장도 이례적으로 1년 만에 경영 일선으로 복귀해 마케팅과 브랜드, 온라인 비즈를 총괄한다. 비메모리 실적 부진으로 당초 교체 가능성이 거론된 박용인 시스템LSI사업부장은 이번 인사에서 유임됐다.
재계에선 삼성의 올해 정기인사는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아직 잔존하는 상황에서 변화와 안정을 동시에 추구한 인사라는 해석이 나온다. 인적쇄신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총수의 재판이 진행 중인 만큼 조직안정이 더 중시됐다는 분석이다.
삼성 사장단 인사가 소폭 자리이동 및 수장 교체로 일단락되면서 추후 있을 부사장급 이하 임원 인사에 관심이 쏠려있다. 삼성은 조만간 후속 인사와 조직개편 사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