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담아낸 치유의 삶
지난 3월 7일~13일까지 인사동 라메르 갤러리에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트로트계의 황제 배일호 협회장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많은 취재진들과 문인들이 자리한 가운데 무대에서 노래하던 가수 배일호가 아닌 화가 배일호로 사람들 앞에 서는 자리였다. 엷은 회색슈트를 단정히 차려입은 배 회장은 기쁨이 담긴 환환 미소를 지으면서도 순수한 소년같은 상기된 표정에서 첫 개인전을 맞는 설레임을 전했다.
극심한 고통 속에 만난 그림과의 인연
배 회장의 개인전은 단지 소일삼아 취미로 즐겨 완성한 작품들을 모아놓은 전시회가 아니다. 이날 세상에 선보인 배 회장의 유화작품 28여 점은 피폐해진 자신의 삶의 낭떠러지에서 길어 올린 희망의 탈출구이자 치유의 열매들이란 점에서 더욱 뜻깊다.
배 회장이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3년 무렵. 사실 고생하며 자란 그에 비해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해 미대를 나온 아내와의 결혼은 쉽지 않았다. “결혼할 때 처가의 심한 반대를 겪었다. 그러다보니 보란듯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제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거 같다.”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책임감이 컸던 배 회장은 가수에게는 치명적인 귀울림 증상을 겪으면서도 무대에서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아내에게 하루에도 10~20통씩 전화를 걸 정도로 아내에 대한 집착이 커져가는 모습에 혹시라도 의처증이 아닌가 불안해 병원을 찾기도 했다.
배 회장은 의사로부터 의처증이 아니라 과도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소견을 들었다고...
“미대출신인 아내가 갑자기 떠날까봐 불안했다”며 힘겨웠던 시간을 소회한 배 회장은 그 무렵 5~6년째 메니에르 증후군 증세를 앓았다. 메니에르 증후군은 청력이 저하되고 현기증 증상이 동시에 심해지는 질병이다. “갑자기 주변 사물들이 캔이 찌그러지는 듯한 일그러진 형상으로 변하면서 압박하고 조여왔다. 천장은 내려앉아 짓누르고 사물들은 뒤틀어진 기괴한 모습으로 보이기까지 해 제 일상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배 회장은 이러한 증세가 악화되면서 청력도 안 좋아져 귀를 들어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아내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으며 아내의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된 배 회장은 아내의 권유로 그림을 시작했다.
“약물치료도 병행했지만 붓을 잡고 그림에 몰두하면서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았다.” 배회장에게 그림은 새로운 안식처였고 육신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통로였다.
가정에도 그 어느 때보다 화목이 찾아왔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배 회장은 밤을 지새울 정도로 그림에 빠져들었다. 그림은 배 회장에게 몸과 마음을 짓눌렀던 무거운 질병들에서 하나둘 해방시켜주는 치유의 행복을 안겨주었다.
배 회장이 그림과 함께 했던 지난 2년 여의 시간은 깊숙이 곪아 굳어진 그의 어린시절의 상처들까지도 해독시켜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을 수 있게 해주었다.
든든한 지원군... 아내 손귀예 화가
배 회장은 어린시절을 떠올리면 힘들고 불행했던 기억들이 많다고 한다.
아버지가 술과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린 탓에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해야 했고 돈이 없어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사지 못했을 정도로 가난했다. 견디기 힘든 불행한 상황에 어린마음에 대통령에게 아버지를 잡아가라는 편지를 쓴 일도 있었다. 배 회장에게 유년의 추억은 기억한 켠에서 외면당한 채 잊혀져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암울하고 어두운 느낌을 담아내는 것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한(恨)의 표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 회장은 그런 감정들을 자연스레 화폭에 담아내며 응어리들을 풀어나간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내면을 가감없이 담아내는 화폭 위에서 그는 더욱 풍부하고 자유로운 소통을 누리고 있다. 그림은 그에게 달콤한 휴식이자 또 다른 세상의 안내자였다.
아내 손귀예 화가는 그림을 그리며 행복해하는 남편의 모습에 흐뭇함과 고마움을 전했다. “가수활동은 본인이 직업인만큼 매진해 열심히 했지만 그림에 대해서도 애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행복해보여 좋다.”며 미술을 이론적으로 더 배우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지금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마음껏 펼쳐내는 과정에서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을 더 많이 누리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서양화가인 손귀예 씨는 배 회장에게 처음 그림을 권유한 든든한 지원군이자 늘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조력자이다. 남편의 작품 중에서「환상」을 가장 좋아한다는 손 화가는 “「환상」이라는 작품 속에 열정과 환희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남편이 가수로서의 왕성한 활동 못지 않게 화가로서도 계속 활동하길 바란다”며 응원했다.
배 회장은 “ 아내도 많이 힘들었을텐데 제 곁에서 견뎌주고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주어 늘 고맙게 생각한다.”며 모든 작품 속에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담았다고 전했다.
“아내란 단어는 항상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떨리는 말이다. 아내는 제 마음의 가난을 풍요로운 행복으로 바꿔준 사람”이라는 말로 아내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내비쳤다.
이번 전시가 유화에 집중된 점도 아내 손 귀예 화가의 영향이 컸다.
“아내가 유화를 그리는 화가이다 보니 어깨너머 배운 걸 따라하는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 친근하고 익숙해졌다. 집 안에 모든 도구들이 갖춰져 있는 점도 그만큼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이 되었다.” 타고난 소질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다른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해주니 더 기분이 좋고 자신감도 생긴다며 유년의 상처를 털어낸 아이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나눔을 위한 행복한 삶
현재 사단법인 한국전통문화예술진흥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배 회장은 “회원들에게 미안함도 있고 미력한 힘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해 협회가 더욱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협회장으로서 전통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도 고민이 많음을 내비쳤다.
한편 배 회장은 공연수익금을 소외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등 사회나눔 활동에 모범을 보이는 가수로도 유명하다. 첫 개인전의 판매 수익금 전액을 불우이웃을 위한 성금이나 원로가수들의 효(孝)기금으로 기부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아내와 함께 열었던 부부유화전의 판매 수익금도 모두 불우이웃성금으로 기부했을 만큼 나눔에 앞장서고 있다.
(사)전통문화예술진흥협회 박상근 이사는 “배 회장은 결혼축의금 전액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기부하고, KBS사랑의 리퀘스트 방송을 통해 성금 1,000만원도 서슴없이 기부하곤 한다.”며 베풀기 좋아하는 그의 성품을 전했다. 또한 전시전에 내놓은 작품들도 하나같이 배 회장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실력을 보여주는 수작이라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그림을 그리면서 배 회장은 충분히 행복했고 위로받았다. 그러기에 더 이상의 명예나 물질을 탐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던 그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통로이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앞으로는 한국화를 더 많이 하고 싶다. 수묵화, 문인화, 그리고 서예도 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서예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다. “서예에 푹 빠져보려 한다. 어린시절 가정형편 때문에 수업을 듣지 못할 때마다 먹을 갈아 혼자 글씨를 썼다.”는 그에게 붓글씨는 유년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소중한 벗이기도 하다.
인생의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할 화가로서의 길
갤러리 벽에 걸린 다양한 유화작품들은 배 회장이 힘겹게 고통의 터널을 지나며 일궈낸 흔적임을 보여주듯 한결 홀가분해진 영혼의 빛을 내뿜고 있다. 배 회장의 그림은 특별하게 과장되거나 인위적인 요소들을 배제시킨다. “마음이 가는대로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다.” 그렇게 붓을 잡다보면 어느새 그도 화폭 속에 고스란히 녹아든다. 그가 태어난 충남 논산의 들판을 그릴 때처럼 밝은 작품들도 있지만 어둡고 거친 느낌도 지워 내거나 숨기지 않는다. 진솔한 향기 그대로의 그 자신이고 또 그런 자신을 표현하다보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가 풀리듯 그의 응어리들도 씻겨진다.
‘신토불이’, ‘장모님’, ‘꽃보다 아름다운 너’, ‘99.9’ 등의 히트곡 가수로 잘 알려진 배 회장은 10대 가수상을 여러 차례 수상함은 물론 각종 국무총리표창과 통일문화 트롯인기가수 대상을 받는 등 가수로서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올 가을경 20번째 앨범도 낼 생각이라고 한다. “가수는 저를 거듭 태어나게 한 동기를 제공했다면 그림은 제 인생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고백이 보여주듯 국민가수 배일호는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많은 이들의 응원과 기대 속에 화가로서의 의미 있는 행보를 시작했다.
자신의 스토리를 담아 소통하는 작품세계
이제 그는 50대 중반을 넘고 있다. 넘어져도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게 인생이라고 말한다. 음악과 그림 모두 하나의 문화산물이라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는 배 회장에게 화가로서의 길은 여전히 소통의 창이기도 하다.
노래를 통해 인생을 표현하고 대중과 호흡했다면 이제 화폭에 담아갈 그의 새로운 인생 또한 대중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꿈꿀 수 있게 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암울했던 자신의 삶과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내게 해준, 화가로서의 꾸밈없는 솔직함과 순수한 열정이 그의 그림 속에 투명하게 담겨있다.
“저만의 스토리가, 제가 살아온 날들이 녹아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소통의 힘을 간직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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