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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 2026-08-31 03:59 (월)
종합

[데일리 여행] 우리 모두는 한때 히스클리프였다, 영국 하워스 문학기행②


하워스 사제관을 뒤쪽으로 빠져나와 작은 소로를 따라 마을 서쪽으로 향한다. 여기서 폭풍의 언덕의 모티브가 되었던 탑 위딘스(top withins)까지는 4km를 가야한다. 아주 가깝지도 않고 아주 멀지도 않은 거리다. 일단 마을을 빠져나오기 시작하면 넓은 들판이 완만하게 오르내리며 물결치는 목초지가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은 아름다운 벌판에 제각각 양을 키우고 있다. 멀리 보이는 언덕이 지평선을 만들면서 아득한 정경을 만들어 낸다.

실상은 가상을 쉽게 배신한다. 문학 작품과 지리적 환경의 연관성을 찾는 일은 때로는 무용하다.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만들어진 세계는 자주 사실을 넘어 멀리 달아난다. 그래서 우리가 문학 작품 속 장소를 찾아가는 것은 작가의 상상력에 우리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기 위함이다. 차이는 우리 각자가 상상의 거리에 이름을 붙임으로 새롭게 재탄생한다. 그러면 공허하고 황량한 풍경들은 의미가 되어 되살아나고 우리는 저 멀리 있는 누군가와 그리고 지금 밟고 있는 땅의 기원과 관계맺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작품 역시 새롭게 태어난다.

포장된 도로가 끝나면 무어랜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좁은 길을 걸어가다보면 초록 풍경 속에 드문드문 보라색 물을 들이고 있는 히스 꽃을 만나게 된다. heath와 cliff가 heathcliff가 되었다. cliff는 절벽이라는 뜻이니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히스클리프는 절벽 속 히스의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히스 꽃의 꽃말이 고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상의 인물일지라도 가혹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히스클리프에게는 기원이 없다. 히스클리프는 어느 날 언쇼 가가 살고 있는 워더링 하이츠로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어떻게 버려졌는지 그리고 어떤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폭풍의 언덕>에서 히스클리프는 정말로 절벽의 히스처럼 황야에서 탄생한다. 우리는 그의 가계와 뿌리를 물을 수 없다. 그는 우리의 본성으로 질문처럼 던져진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통해 히스클리프를 본다. 히스클리프는 때로는 사랑이고 때로는 정열이고 때로는 광기이다.


어린 시절 내게 <폭풍의 언덕>은 멜로드라마였다. 주인공은 사랑을 얻기를 원하지만 성취는 영원히 지연된다. 하지만 현실적 장애물이 그들을 막고있어도 사랑은 변치 않고 영원히 남는다. 불우한 히스클리프는 가장 낭만적인 존재가 되었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광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었다. 그때의 내가 단 하나의 유일한 사랑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사랑을 겪게 되면 히스클리프가 되어야 했다. 혹은 누구도 아닌 히스클리프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첫사랑을 겪게 되면 누구든지 히스클리프가 되어 버리고 그러고 나면 자신 속의 히스클리프를 내던져버린다.

이십대가 되어서 나는 히스클리프를 경외했다. 그는 신념의 인물이 되었다. 그 당시의 내 눈에 히스클리프는 예수와 닮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감정은 충동적으로 일어나 사그라지는 자연발생적 유기체가 아니었다. 사랑의 감정은 지독한 인위가 되었고 이내 신념이 되었다. 끔찍한 신념을 갖고 워더링 하이츠로 다시 돌아와 캐서린과 자신을 갈라놓은 사람들에게 복수를 퍼부을 때 히스클리프는 가학적으로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내게 신앙은 어떤 신성한 인위였고 사랑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걸 지켜내지는 못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신은 우리를 끝까지 돕지 않는다. 신앙이 삶 그 자체가 되도록 신은 어느 순간 도움의 손을 거두어 버린다.


길가에 피어 있는 히스 꽃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단단하게 땅에 바싹 엎드려 있는 줄로만 알았던 히스 꽃의 외모는 생각보다 연약해 보인다. 꼭 작은 은방울꽃 같다. 가만 생각해보면 여린 사람만이 불같이 타오른다. 자신의 무력을 감당하지 못해서 화기로 그것을 가리는 경우가 있다. 연약성이 증오도 키우고 그리움도 키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히스클리프는 가장 여리다. 그리고 여린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때가 있다.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을 염원하다가 도망치는 이유는 아주 사소한 일 때문이다. 캐서린은 마음이 에드가에게 기울고 넬리에게 고민을 털어 놓는다. 어린 캐서린은 에드가와 결혼할 생각을 하지만 속 깊은 곳에서는 히스클리프를 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히스클리프를 사랑하지만 그의 지난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와 결혼하는 것은 스스로 천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히스클리프는 그녀의 말을 엿듣다가 도망가버린다. 그리고 3년 후에 다시 돌아와 복수를 시작한다. 하지만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이어지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가 알아서는 안 돼. 넬리,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그 애의 영혼과 내 영혼이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어."

탑 위딘스가 점점 가까워진다. 조금씩 지쳐갔다. 나는 이제 히스클리프를 동정한다. 그의 광기가 이제는 정말 폭력이다. 바라는 것을 갖지 못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참을 수가 없다. 자신이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이 몇몇 중요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히스클리프는 애초에 행복할 수가 없다.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운명이다.

히스클리프는 정념 자체이다. 그리고 자신은 자기 자신 그대로를 인정할 수 없다. 세상의 법칙들은 우리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너무 허술하다. 울음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이 세상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타인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저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폭풍의 언덕에 서면 이곳이 고독을 위한 곳이 아님을 알게 된다. 광풍이 불어 몸을 가누기가 힘들지만 이곳은 엎드려 숨어 있는 곳이 아니다. 세상을 버리고 내세를 지향하는 곳도 아니다. 언덕은 세상의 절반에 걸쳐 있다. 앞을 보면 황야는 끝이 없고 뒤를 보면 세상 사람들이 있다. 내가 몰랐던 정서는 기다림이다. 히스클리프는 이곳에서 캐서린을 기다린다. 캐서린이 죽고 나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녀를 만나게 되기를 기다린다.

그는 여기서 세상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시간을 넘고 공간을 넘어서 자신의 바람을 기다린다. 히스클리프는 절대 죽음과 고독을 향하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서 염원한다. 히스클리프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안에 그가 있기 때문이다. 히스클리프는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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