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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 2026-08-31 02:20 (월)
종합

‘아토믹 블론드’, 세상은 비밀 위에 세워진다

한 첩보원이 자신이 맡았던 임무에 대해 취조를 당한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윗선들은 MI6의 정보원 로레인 브로튼(샤를리즈 테론 분)을 ‘캐기’ 시작한다.

동독과 서독이 장벽을 철거하고 통일되기 직전, 영국은 자국과 미국의 스파이 명단이 적힌 리스트를 소련에서 빼내오기 위해 작전을 시작했다. 자칫 리스트의 인물들이 위험해 질 수 있는 상황. 베를린으로 파견된 로레인은 MI6의 영국 지부장 데이빗 퍼시벌(제임스 맥어보이)을 만나 리스트를 찾아 나서지만 리스트는 서독으로 망명하고자 하는 동독의 비밀 경찰 스파이글래스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게다가 퍼시벌을 통해 이중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로레인. 베를린에서의 작전이 점차 미궁으로 빠져 들어간다.

‘매드맥스’의 여전사 샤를리즈 테론이 주연을 맡아 생활 액션을 보여주는 ‘아토믹 블론드’의 주제는 ‘비밀’이다. 냉전 시대의 끊임없는 첩보 활동은 속고 속이는 일의 반복이었다. 영국의 정보 요원 출신의 소설가 존 르 카레 원작의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는 스파이들이 서로를 속이는 소모적인 일의 피로가 마치 삶의 무게처럼 표현되었다. 삶은 그 자체로 누군가를 속이는 일이고 때론 죽음보다 비밀이 무겁다.

‘아토믹 블론드’는 스파이물이지만 화려한 무기가 등장하거나 주인공이 임무를 완수하는 쾌감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다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서로를 속이고 부단히 몸을 소진하는 고난의 여정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고단함이 만들어내는 회의감이 냉전시대에 대한 회의감으로 그리고 이념과 이념의 갈등에 대한 회의감으로 이어진다.

비밀은 이 영화의 키워드다. 이야기는 로레인이 베를린에서 일어난 일을 취조실에서 설명하기 위해 회상하는 장면들로 구성된다. 이때 회상을 통해 로레인의 기억을 들어야만 하는 관객은 진실을 구분하기에 굉장히 불리한 위치에 있다. 한 사람의 기억은 이미 불분명한 진술이다. 영화는 애매모호함 속에서 시작한다.

베를린이라는 장소는 이러한 사실과 거짓을 확인할 수 없는 모호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동서의 구분은 서로를 가리는 위장의 안개 아래서 항상 불분명한 채로 유예된다. 주인공이 점차 진실에 다가갈 때도 사실은 명확하지 않다. 모든 것이 비밀에 덮여 있다. 로렌스는 베를린에서 작전을 포기한 프랑스 여자 스파이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인지 로렌스의 진의는 알기 어렵다.

결말에서 영화는 로렌스를 정의의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 결국 명명백백한 진실과 사실의 자리를 확보한다. 정의는 언제나 진실을 혹은 진실에 대한 착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를린에서의 진실 공방은 관객을 완전한 안개 속으로 데려다 놓는다.

이 과정에서 사건의 진전이 없어 이야기가 늘어진다. 하지만 이 부분이 ‘아토믹 블론드’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관객들을 냉전시대의 베를린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어느새 진실을 확보하려고 애쓰는 스파이의 심리전에 동참한다.

영화 전반에서 샤를리즈 테론의 액션 장면들은 화려하고 통쾌한 움직임으로 해소감을 주기보다는 오랜 시간 어려운 숙제를 푸는 것처럼, 지긋한 열병에 앓는 것처럼 지난하게 이루어지며 소모감을 준다. 혈투에 가까운 이러한 액션 장면들이 도리어 만족감을 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관객이 주인공의 몸에 공감하게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신선하다. 특히 10분 가까이 이어지는 롱테이크 계단 액션 장면은 보는 이들을 지치게 할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아토믹 블론드’는 여러모로 독특한 면이 많이 담긴 영화다. 모든 면에서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개성적인 측면이 많다. 여성 액션 캐릭터의 계보를 잇는 샤를리즈 테론의 연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80년대의 정서를 표현하는 연출 및 편집 방법, 정서와 주제를 표현하는 록 음악 선곡 역시 감각적이다.

‘존 윅’을 감독했던 데이빗 레이치는 차기작으로 ‘데드풀2’가 예정돼 있다. ‘아토믹 블론드’의 스타일, 주제를 표현하는 구성, 액션의 표현을 고려하면 ‘데드풀2’를 기다리는 관객들은 충분히 기대를 걸어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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