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에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중에서도 백야 김좌진 장군은 그의 용감한 행동으로 한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그의 가장 큰 승전 중 하나가 "청산리대첩"으로, 이 전투에서 그는 단 60여 명의 전사자와 함께 10,000여 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충남 홍성 출생으로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개화사상에 민주적 가치를 심어주는 경향을 보였다.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장교로 임관한 그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해산된 후에도 독립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대한광복회에 가입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그와 독립운동가 38명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항일운동을 가속화시켰다. 그 이후에는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독립군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승전 후, 백야 김좌진 장군은 일본의 독립군 소탕작전으로부터 도망가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 적군의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신민부"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나, 이 중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독립군 부대가 군자금을 징수하고 징병제를 시행하면서 민심을 상실한 것이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1930년 1월에 흉탄을 맞아 순국하였지만, 그의 승전과 희생은 한민족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의 업적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아있으며, 우리는 그의 희생을 기리며 그의 역사적 중요성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항일 독립전쟁 사상 가장 빛나는 승전으로 한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준 백야 장군을 경모하는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危邦憂客轉憂思(위방우객전우사) 위태로운 나라 애국지사가 (이국에서) 나라 걱정하고
槿域三千海賊馳(근역삼천해적치) 무궁화 삼천리 강토 (국권 강탈한) 해적이 차지했네
月下磨刀常勝礎(월하마도상승초) 달 아래에서 칼을 갈아 상승의 주춧돌을 놓고
嶺上秣馬出兵基(영상말마출병기) 재 위에서 말을 먹여 출병의 기초를 닦았네
靑山大捷遺民悅(청산대첩유민열) 청산리대첩 승리하자 망한 나라 백성은 기뻐했고
自由風波獨立萎(자유풍파독립위) 자유시참변 무장해제로 독립군 활동은 시들어말랐네
不惑散花讐未報(불혹산화수미보) 나라의 원수를 되갚지 못하고 40세에 순국했으나
驚天動地萬人追(경천동지만인추) 세상을 놀라게 한 대첩 모든 국민이 추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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